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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의 제자도
조나단 도슨 지음, 전의우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3년 8월
평점 :
한국 교회가 80년대를 전후하여 제자훈련을 해 왔다. 이 제자훈련이 성숙인가? 복음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개 교회, 각 단체마다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각 개인의 훈련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서도 많이 다를 것이다.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제자훈련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제자훈련 안한 단체가 없었고, 교회마다 제자훈련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한국 교회의 쇠퇴로 돌아 왔다. 무엇때문인가? 제자훈련의 문제는 없었는가? 그나마 제자훈련을 했으니까 이정도만 줄었다고 항변할 것인가? 그렇게도 많은 훈련생들이 영혼구원에 포커스가 맞춰진 훈련을 받았다면 분명 이런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보완점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 내가 느끼기는 최종 꼭지점의 차이였다고 생각한다. 전도도, 영혼구원도, 생명을 살리는 것도 강조했고, 중요시 여겼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개인의 성숙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제자훈련의 중심축을 바꾸어야 한다. 영혼구원으로, 생명 살리는 축으로 변환시키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소망이 없다.
이 책은 제자훈련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면들을 파헤치고 있다. 제자훈련 하는 목적인 배가인가? 성숙인가? 저자는 청년 시절에 한 여성을 알게 됨으로 성적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방황하는 경험을 하였다.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무던 애를 썼지만 결코 되지 않았다. 즉 제자도를 성숙으로 본 것이었다. 그러나 성숙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어떤 사람은 배가로 본다. 즉 전도로 본다. 제자훈련 하는 목적이 오직 전도라는 것이다. 영적 성결 따위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전도만 되면 되지 그 사람의 경건과 도덕과 영성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분리를 ‘복음 나누기’라 부른다. 성경은 신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인’보다 ‘제자’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제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기본 범주다. 우리는 먼저 제자이고, 그다음에 부모이거나 피고용인, 목사이거나 집사, 배우자다. 제자는 신분(정체성)이다. 나머지는 모두 역할이다. 우리의 역할을 일시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은 영원하며 경이롭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자를 확실히 정의하는 게 더없이 중요하다. 제자라는 의미에서 전도와 제자도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즉 전도 아니면 제자도를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식이다. 제자도에서 은혜의 복음을 제거하고, 전도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제자라는 의미를 도덕적 성적표를 받는 것으로나, 복음을 천국을 보증하는 예약 티켓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잘못된 복음관을 제자도에 적용하면, 복음은 전도 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결과 제자도는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의 신학이나 경건, 사회정의 같은 뭔가 더 ‘진보된’ 것ㅇ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제자도를 전도와 분리한다. 이처럼 전도와 제자도를 분리해서 본 것은 지상명령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이든, 그리스도인을 성숙시키는 사명이든, 이 둘 중 하나가 지상 명령의 중심이다”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해석은 빈혈에 걸린 복음을 낳는다. 지상 명령은 바로 복음 중심이다. 이젠 통합하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 ‘복음 중심의 제자도’는 전도와 제자도를 분리하기보다 통합해야 한다. 복음을 제자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을 수직적 제자도로 볼 수 있다. 즉 복음으로 변화된 제자들이 경건, 기도, 예배, 성숙에 기쁨을 느끼는 삶이다. 다음은 수평적 제자도, 즉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는 것이다. 즉 선교 중심의 제자도를 말한다. 이젠 통합형 제자도로 나아가야 한다. 통합형 제자도는 경건이나 선교가 아닌 예수님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도는 허물어지고, 해체되며, 실망스럽게 된다. 복음은 제자도의 중심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복음의 좋은 소식을 믿을 때, 제자도는 우리를 그분의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고 깊이 통합한다. 그분의 주 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서는 경건한 행위나 선교적 행위가 아닌 삶 전체를 드려 그분께 헌신하게 된다.
제자도는 형상을 위한 싸움이다. 남자나 여자나 싸우는 것을 좋아 한다. 남자는 스포츠, 격투기, 죽이는 게임 등등, 여자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 다른 여자보다 더 예뻐 보이고자 하는 욕망, 인기를 끌고자 하는 시기심 등이 싸움에 갈망을 보여준다. 그런데 인간적인 보이는 형상을 위한 싸움을 우리를 더욱 더 괴롭게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것은 닮아도 닮아도 기쁘고 행복하다.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도로 나아가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 성경은 그래서 곳곳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세상의 것들과 싸워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싸우라는 것이다. 즉 악한 영들과 싸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고 보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뒤틀린 동기가 있다. 제자도란 의미를 지나치게 율법을 적용하여 정죄한다. 아니면 자신의 죄를 고해성사하고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제자도를 죄짓지 않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자들끼리 사실 책임관계를 맺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등의 고상한 목적에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임 관계가 빈번히 규범 지키기 혹은 규범 깨기에 기초한 관계로 전락한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규범을 지키지 못했다며 사람들에게 벌을 준다. 반면 반항적인 사람들은 서로의 실패를 못 본척하며 은근슬쩍 넘겨 버린다. 둘 모두 규범 중심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규범을 지키려 들고, 반항적인 사람은 규범을 깨려 든다. 우리는 ‘책임을 일삼는 모임’에 속했던 경험이 있든 없든, 모두 규범을 지키거나 깨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모든 제자는 ‘종교적 행위’ 혹은 ‘영적 방종’으로 기운다. 어떤 제자는 두 극단을 오간다. 우리가 경건한 삶을 열심히 살면 인정해주실 것을 기대하거나, 선교적 관점에서 전도를 열심히 하면 좋아 하실 것을 기대하는 착각에 빠진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게 아니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주인 삼으려한다면, 제자도의 중심에서 복음을 제거한 셈이다. 복음의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그분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섬긴다.
복음은 제자도의 중심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지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신 게 아니라 진정한 선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셨다. 왜 마음인가? 마음은 인간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중심이다.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우리의 마음이 선하든 악하든 이는 동기의 창고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바로 이곳, 곧 동기에서 시작된다. 실제로 동기가 행동보다 중요하다. 시34:8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했다. 맛본다는 말은 미친 듯한 감정에 빠져든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감정, 곧 하나님을 진심으로 흠모하는 것으로 우리는 변화시킨다. 종교 감정과 복음을 분리하기란 쉽지 않다. 거저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맛본 사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분을 좋아 하고 이유 없이 존경한다. 그분을 따른다. 이런 사랑과 존경의 감정을 가진 제자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운다.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선물을 주신다. 회개는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죄에서 돌이키는 일은 우리의 일이고,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회개는 믿음과 동떨어진 다른 무엇이 아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는 성령님이 임하신다. 성령이 없이는 복음적 거룩도 없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모든 제자로서의 경건과 복음 전파의 삶의 핵심이다. 성령님은 ‘결정하기’와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도우신다. 즉 어떤 일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세밀하게 역사하신다. 내가 경험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즉, 어제 설거지를 했으니까 오늘은 하지 않아도 돼) 또 다시 하기를 원하시는 음성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신다. 또한 어떤 죄악의 유혹에서도 벗어나게 하시는 능력을 주신다.
공동체적 제자도를 형성해야 한다. 즉 교회 공동체 전체가 주님의 제자로를 실천함으로 그 공동체에 소속된 제자들이 주님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제자가 되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더욱 적극적으로 제자도가 실행되게 해야 한다. 공동체가 부분적 제자도로 그쳐서는 안된다. 즉 경건, 선교, 주님을 본받기 등에서 모든 부분에 제자도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은 그 공동체가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운동을 벌이면 된다. 그러기 위해 파이트 클럽을 만들어라. 즉 세상과 악의 세력과 함께 싸울 수 있는 클럽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돕고, 협력하고 격려하며 죄와, 세상과 보이는 형상을 찾아가는 유혹과 싸워 이기게 하는 그런 클럽을 만들어 세상과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것이다. 영적 싸움은 주님이 기뻐하시고 도와주신다.
결론적으로 제자도란 한 쪽에 치우지면 안 된다. 즉 경건도, 전도도 다 부분적일 수 있다. 그 중심이 율법적이거나, 규율로부터 방종이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을 마음 중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여 그분과 교제하며 그 분이 주시는 성령님의 힘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는 삶을 살면 경건으로 영광 돌리고, 전도도 하는 진정한 제자가 된다. 이것이 복음 중심의 제자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