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를 맡기고 산다

 

 

 

 

 

 

 

오래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응당 그래야한다 여겼다.

골동품 같은 우정, 오래 가는 사랑, 한결 같은 마음.

세월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이다. 맞다.

그런데 친구의 경우 한번 마음의 물길 트면 어떤 계기가 없는 한

일부러 단교할 일도 없다.

그런데도 세계 표준시간 경과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가는 since에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철없을 땐 만남의 횟수마저도 중요했다.

다다익선. 일년에 한 번도 안 만나면 우정이 식었다 여겼다.

때로 마음이 심드렁해도, 그러니까 낡은 싱크대 문짝처럼 마음이 덜렁거려도

멀쩡한 듯 닫아놓고, 가급적 열어보지 않으며 계절을 넘기기도 했다.

서른 넘기고 인생사 복잡계 수준으로 얽혀 수년간 못만나도

10년 지기, 20년 지기 인연의 마일리지는 스스로 강물처럼 불어났다.

오래된 만남=고귀한 인연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묻게 된다.

오래된 관계가 꼭 좋은 건가? 나는 왜 오랜 만남에 가치를 두었을까나.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부분을 보낸다.

엄마, 아빠, 형제자매, 학교의 선생님, 친구들, 직장 동료.

내가 골라서 관계망을 형성할 수 없다.

이게 얼마나 폭력적인 상황인지 모른다.

미우나 고우나 얼굴 보고 살아야한다는 것.

생의 번뇌의 8할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친구는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고마운 대상이다.

상대적으로 책임이 적고 향락이 크다.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관계의 감정 노동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영역이 ‘친구’다.

사랑은 때로 무간지옥의 고통을 수반하므로 빼기로 한다.

암튼 오래 된 친구일수록 더 여유작작하다.

결국 익숙함.

그런데 편안한 게 꼭 좋은 것 같지는 않다. 길들여지니까. 둔감해지니까.

니체도 말했다.

친구는 ‘야전침대’가 돼주어야 한다고.

오리털 이불같은 친구라면 마냥 잠들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

딱딱한 침상에서 잠시 피로만 풀고 다시 떠나도록 절제된 우정을 권유했던 셈이다.

 

 

 

 

 

요즘 잇달아 ‘일시정지’였던 인연들과 상봉했다.

그 중에 내가 선생님이라 부르던 그.

미국에 유학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귀국소식을 들었는데 훗날 극적인 상봉을 위해 굳이 연락하지 않다가

용건이 생겨서 전화했다.

“선생님. 저 누군지 알겠어요?”

“당연히, 알죠!”

 퍼즐조각을 맞춰보니 3년만의 재회인데 난 10년 쯤 된 것 같았다.

전화는 사랑을 싣고.

상봉의 감동을 나누었다.

아직도 그 동네 사느냐. 아들은 많이 컸겠다, 우리 그 때 그랬지 않느냐 등등.

10년전 처음 만나 집이 가까워서 가끔 만나 영화도 보고

어느 눈 내리느 겨울엔 술마시고 2차로 우르르 몰려

그의 집에도 놀러가고 그랬었다.

기억의 통로를 통해 들어간 과거.

거기서 좋다고 놀고 있는 이십대 처자가 보이지 뭔가.

어설프기 한량없던 나. 괜히 눈물이 나려해서 혼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고 지금은 누구와 일하고 무엇에 기쁨을 느끼고 산다고

말하는데, 내 입으로 나를 설명하려니 어색했다.

내 삶이 내 살 같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막 살지는 않았다는 안도감과 더 잘살아둘 걸 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나에 대해 느끼는 낯섦.

그 긴장이 짜릿했다.

친구라고 붙어있는 게 능사는 아니구나 싶다.

같이 뭉개는 시간의 양, 묵은 정도 의미 있지만

그보다는 상호 촉발을 일으키는 강도, 우정의 차이화 능력이

인연을 키우는 힘 같다.

관계의 지속이거나 우정의 안식년이거나 인연의 소멸이거나.

그렇게 멈추고 바뀌는 것들 속에 나를 맡기고 산다.

인연의 지형도가 인생의 내신성적표이다.

 

 

 

- 끝 -

 

 

 

* 그동안 『올드걸의 시집』을 사랑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8회를 마지막으로 『올드걸의 시집』은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 위의 글은 에세이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어느 겨울.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한 시간 가량 운전을 해서 집에 왔다.

남편과 아이들은 잠들고 나는 거실에 멍하니 있었다.

두 눈만 꿈뻑꿈뻑. 모드변환 중이다.

몸에서 식용유 냄새랑 트리오 과일향이 빠져나가길,

다시 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이 복잡했다.

일체유심조를 이루고자 반야심경을 읽는 심정으로 시집을 뒤적거리는데

문자가 왔다.

"뭐하니?"

"그냥 있어."

술자리를 마치고 가는 길인데, 뭔가 아쉬워서 연락했다는 그.

문득 마음이 동했다.

자기재건 본능인지 떠남의 욕망인지 모를 기습적인 충동이 일었다.

우리는 술꾼처럼 ‘딱 한잔만’ 하기로 했다.

그는 2호선 반대방향으로 갈아타고 되돌아오고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양화대교를 건넜다.

합정역 4번 출구에서 상봉했다.

베시시 웃고는 사뿐히 팔짱을 끼고 홍대 쪽으로 걸었다.


얼얼한 바람이 전신을 휘감았다. 정신이 들고 생기가 돌았다.

호프집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시댁에서 술집으로 배치가 바뀌니까 존재가 달라진다.

비록 무릎 나온 추리닝의 꾀죄한 차림이지만,

재투성이에서 신데렐라로 변신한 것 같았다.

역할이 아니라 영혼이 만나 마주하니 좋았다.

해야 할 얘기와 하지 말아야할 얘기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그렇게 감정의 평형상태를 즐기는데 자꾸 목 앞쪽이 껄끄러웠다.

목걸이도 안 했는데 이게 뭔가 싶어 만져봤더니 스웨터 상표였다.

황급히 나오느라 윗도리의 앞뒤를 바꿔 입은 거다.

‘나 다급했나…’

웃기면서도 부끄러웠다.

화장실 가서 고쳐 입고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우리는 고속버스 승객처럼 나란히 앉아 떠들다가

고개 뉘여 그의 어깨에 잠시 기대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얼굴에 차고 다순 알갱이가 톡 떨어졌다.

눈, 눈발이 날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영화 <러브레터> 주인공처럼

고개가 젖혀지고 두 팔이 벌려졌다. 나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 싸락눈 깔린 하얀 아스팔트를 밟으며 다시 합정역까지 걸었다.

 

 

 

 

 

 

 


다시 겨울. 삼선동에 이사 오고는 대학로를 한 번도 못 갔다.

전에는 업무수행 혹은 친교활동을 위해 종종 들르던 동네다.

가까우니 멀어진다.

대학로에 있는 그에게 그리움 담아 문자를 넣었다.

"보고잡소."

"나도 보고잡소."

급작스럽게 삼자회동이 성사되어 한 시간 뒤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그가 데려간 곳은 ‘민들레처럼’.

박노해의 시 제목인데 술집 간판으로도 어울렸다.

강남에서 근무하는 그의 후배는 벌써 와 있었다. 택시타고 왔단다.

“너 다급했니…”

키득키득.

나는 안다.

누구를 만나고 싶은 자가 아니라 어디로 떠나고 싶은 자는 달린다. 전속력으로.

초과노동과 인간소외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땅으로 한달음에 간다.

그곳은 편안한 소파에 안주가 푸짐했다.

도토리묵, 파전, 과일샐러드, 북어포, 오뎅탕이 이만원이란다.

배경음악도 친숙한 7080 노래가 흘렀다.

처음처럼 각 1병씩 마시고 수다도 비우고 술집을 나갔다.

예기치 못한 선물. 눈이 날린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민들레홀씨처럼 지상에 내려앉지 못하고 공중을 휘젓는 눈.


그해 겨울. 용산참사 노제가 열리던 날도 그랬다. 민들레처럼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 펑펑 그칠 줄 몰랐고

남일당 앞 스피커 차에서는 ‘민들레처럼’이 연신 울려 퍼졌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온몸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구슬픈 가락 따라 눈사람이 된 유족과 검은 영정사진이 무겁게 흘러갔다.

거침없이 피어나 짓밟힌 사람들.

고조되는 목소리.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오..”

언젠가 봄은 온다고들 말하지만, 당사자에게 겨울은 너무 길고 춥다.

구체적인 아픔을 무화시키고 봉합해버리는 상투적인 결말이 거슬렸다.

우리는 봄을 기다리기보다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나는 법을 노래해야하는 게 아닐까.

마디마디 분절되어 살갗에 닿던 민들레처럼 말이다.


그는 가고 둘은 남았다.

우리는 시야가 흐려지는 몽환적인 눈을 맞으며 학림다방으로 향했다.

창 넓은 찻집에서 꼭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내가 우겼다.

팔짱끼고 걷다가 친구가 뒤뚱 넘어지려는 걸 구제해주었다.

“이런 낭만지수 100% 외출지수 50%인 날,

옆에 있는 사람이 나여서 괜히 미안하다.”

“아냐. 고마워. 나 혼자였으면 분명히 넘어졌을 거야. 얼마나 서글펐겠어.”

애인 있다고 넘어질 때 항상 안전한 건 아니며

발 걸고 같이 넘어지는 놈들도 많다고 위로했다. 애잔한 말들.

비혼이어서 쓸쓸하고 기혼이어서 아니 쓸쓸하진 않다. 인간이어서 적적한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은 인간에게 가장 이로운 존재라고 말했나 보다.

어쨌든 인간의 존재조건인 고독을 등짐 진 두 여자는

좁고 가파른 학림다방 계단을 올랐다.

여전히 달달한 낭만주의 클래식이 흐르고

일제강점기 소설가의 방처럼 담배연기 피어나고

레코드판 즐비하며 소파는 나란하다.

<계몽영화>에서 남녀가 맞선보던 국제중앙다방 세트장 분위기가 마냥 정겹다.

통유리에 안긴 풍경은 넉넉하고

커피는 일품이고

손님은 만석이고

우리들 대화는 처량하다.


"회사 그만두고 싶어 죽겠다. 아주, 아주, 죽을 힘 다해서 짜내고, 짜내서 다니고

있어. 설에 집에 내려갔더니 나 결혼 안 한다고 엄마가 걱정을 엄청 하시는데

회사까지 그만두면 너무 불효 같아서."

"그렇겠다. 번역만 해서는 생계가 어렵지?"

"아는 사람이 작년에 다섯 권 번역했는데 연봉 2천이래. 그만큼 하려면 하루에

10시간 이상 매일 노동해야해. 너는 그쪽 일은 하나도 안 해?"

"응. 요새 글쓰기 싫으네. 사람은 어떤 맹목적인 확신이 있어야 사나봐. 그 거울을 잃어버리니까 맨 얼굴의 내가 보여서 괴롭다."

"그래도 체력 될 때 써라."

"그래야지."

"연령주의에 갇히면 안 되겠지만 일도 사랑도 때가 있는 거 같아. 확실히 남자는 나이 들수록 만나기 더 어렵고."

"근데 사십대를 같이 보내서 한 십년 추억을 공유해야 노년에 말벗을 해도 하지 않을까. 올해는 적극적으로 남자를 만나봐."

"그래야할 텐데 사람이 없네…."

돌림노래같은 주제들. 결론 없는 수다. 오로지 과정으로만 존재하는 삶과 닮았다.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는 테이블에 있는 정사각형 영수증으로 종이학을 접었다.

"아직도 종이학 접을 줄 아니?"

"그러네. 몸이 기억하나봐. 손이 저절로 접은 거야."

 

 

 


데이트 생활자의 겨울. 근래 들어 근무태만이다. 혼자 노는 기술을 알아버렸다.

이를 테면, 파울 첼란의 시집을 사고는

카페에 갔다가 독일풍으로 뮌헨 빵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된장녀 짓을 일삼으니 지루하진 않다. 늘 그랬다.

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바늘 하나로도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생명이고

눈송이 하나라도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러니 이 헛됨을 ‘누리면서 견딜’ 수 있는 한 번의 기쁨, 한번의 감촉,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필요하다.

합정동에 두고 온 그대생각. 남일당에 두고 온 민들레처럼.

학림다방에 두고 온 종이학. 팔뚝에 저장된 체온 같은 것들…

나의 무제한적인 부(副), 눈과 함께 서리서리 쌓인 시간의 기억들.

그것으로 겨울을 나고 일생을 버틴다.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으니까.


 

 

 - 계속 -

 

 

 

* 위의 글은 에세이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고기와 꽃수레

 

 

 


            

 

 

 

꽃수레(딸의 애칭)의 재능, 

여름방학을 보내면서 한 가지 발견했다.

음악 신동도 미술천재도 아니다. 살림영재.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일에 능하다.

집에서 물고기(구피)를 키운다.

점싹이라는 새끼 물고기 한 마리가 제법 커서

세 마리를 더 사다 넣었다.

그랬더니 수레는 황점싹. 이등싹. 박납싹. 김흥싹 등등

무슨 고전동화에 나오는 첨지 같은 이름을 붙여서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고 보살폈다.

구피 사총사는 더욱 날랜 몸놀림으로 물속을 유영했고

새끼를 순풍순풍 낳기 시작했다.

어른 4마리, 새끼 26 마리. 총 30마리로 식구가 늘었다.

이 기적의 드라마. 총연출은 오롯이 꽃수레다.


식탁에 잔멸치 볶음이 나오면

두 손을 귀에다가 나팔처럼 모으고 어항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잠시 후,

“뭐라고 점싹아? 엄마, 이 멸치는 점싹이의 사촌 형이래”

라는 대사를 친다.

백화점 생선 코너에서 고등어를 보면

또 집에 있는 납싹이와 교신을 시도한다.

“이 고등어는 20억 년 전 죽은 납싹이 조상이래.”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 흥싹이가 배고파 죽겠대. 자기만 먹지 말고 나도 밥 좀 주래”

하고 물고기 밥을 꺼낸다.

이제는 새끼 까지 생겨서 일손이 더 분주하고 말이 더 많아졌다.

수시로 어항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그 작은 것들 몸통에서 지느러미가 나오고 꼬리가 생기는

아주 미세한 차이까지 잡아낸다.

핸드폰으로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자랑하고

납싹이의 옆모습, 앞모습, 뒷모습,

위에서 본 모습, 아래에서 본 모습 등

성장과정을 그림으로 남긴다.


꽃수레가 이렇게 재미나게 구피를 키우는 것을 지켜본 친구 한 명이

덥석 어항을 샀다.

그 집에 놀러갔더니 <토끼전>에 나오는 대궐 같은 어항과 수초에

우린 모녀는 기가 죽어버릴 정도였다.

한 달 후.

친구네 물고기 이십여 마리가 몰살했다는 비보가 들려 왔다.

우리는 새끼를 또 낳았다고 했더니

그 화려한 어항을 우리 집에 갖다 주었다.

이틀을 방치하다가 수레의 등쌀에 못 이겨 납싹이들을 옮기기로 했다.

어항이 커서 바가지로 물을 날랐다.

몇 번 왕복하니 귀찮아서

 “니 물고기니까 니가 물을 나르라”고 수레한테 떠넘겼다.

“알았어 내가 할게”

라며 흔쾌히 바가지로 물을 나르던 수레.

지도 힘들었는지 바가지를 들고 쩔쩔매면서 푸념하듯 내뱉는다.

“에유. 납싹이들 죽기 전에 큰 집에서 호강 한번 시켜줄라고 했더니

이렇게 힘이 드네!”


웬 할머니가 들어앉은 듯 구성진 대사에 나는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큰 집에 살고 싶은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꽃수레는 신바람이 나서 중얼중얼

 “조금만 기다려라”

“다 돼 간다”

며 납싹이와 활발히 교신했다.

저것이 어린 아이일까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나중에 작은 수족관을 운영하거나

작은 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엄마가 화초를 아주 잘 키우셨다.

죽어가던 화초도 살려내던 엄마 덕분에

우리 집은 늘 식물원을 방불케 했고

동네에서도 ‘화초 잘 되는 집’으로 유명했다.

난 화초도 못 키우고 애완동물도 별로다.

사람 아닌 것에 좀처럼 마음을 주지 못하는 무정한 여인이다.


살아있는 것을 돌보는 그 성가신 일을 즐기면서

창작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꽃수레.

이박삼일 휴가 가서도 안절부절

‘납싹이들 다 굶어 죽으면 어떡하느냐’

수시로 근심이 서렸다.

속초에서 회를 먹을 때는

“등싹이 증조할아버지의 친구 분”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지 오빠한테

“만날 똑같은 레퍼토리 반복 하냐. 시시하다. 지어내지 말라”

는 구박을 들어가면서도 꿋꿋하다.

옷을 입은 채 바다에 철퍼덕 앉아서는

“납싹이 고향이라 더 아늑하다”며 싱긋이 웃는다.

자기가 구피라도 된 양

물 속에서 파도에 밀려갔다 밀려오며 좋아라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좀 ‘이상한 아이’로 보일 지도 모를 대사들을 연신 남발해가면서.

꽃수레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납싹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물고기가 되어 바다에 몸 담글까를 생각하니

잠시나마 영어수학 선행진도를 걱정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드는 방편으로서의 공부라면

아이와 대화하면서 천천히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2년이 흘렀다.

꽃수레의 지극한 돌봄으로 구피는 백여 마리로 증식했다.

어항도 두 개로 늘었다. 정말 번식력 왕성한 녀석들이다.

많이씩 태어나고 몇몇이 죽었다.

고만고만한 구피 무리에서 용케도 초기멤버 4마리를 찾아

안색을 살피던 꽃수레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파워포인트로 ‘납싹이가 늙어가고 있다’는 자료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그 녀석들이 어쩐지 생기를 잃어가는 듯도 보였다.

유행가 가사대로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며칠 간격으로 납싹이와 흥싹이는 운명을 달리했다.

딸도 울고 나도 울었다.

모녀가 등 돌리고 앉아서 휴지로 코 풀어가면서 눈물 훔쳤다.

구피의 평균수명이 2년이라 각오는 했었지만 막상 죽으니까 서운했다.

그리고 관행대로 제사를 지내주었다.

구피의 제사.

처음 지내던 날이 떠오른다.

하루는 아주 작은 새끼가 죽자 제사를 지낸다고 수선을 피웠다.

식탁 위에 양초 켜고, 휴지로 싼 시신을 놓고,

물고기 밥을 접시에 소복이 담아 제사상을 차리고는

나더러 백팔 배를 같이 하자고 권했다.

얼결에 따라하면서 숨차고 웃기고 찡했다.

모녀의 몸뚱이가 접혔다 펴지면서

거실 바닥이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했다.

‘오십일 배.. 오십이 배.. 오십삼 배..’

물고기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나는 그 다가옴에 응답한다.

마침내 사유 돋았다.

어항 물갈기가 귀찮다고

물고기 없던 시절로 돌아가길 바랐던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반성했다.

내 안에 사는 것들이 다 사라지면 나라는 개체도 해체되겠구나.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구나 등등.

납싹이 새끼의 사망이 함께-있음의 존재론까지 뻗어가자

푸푹 웃음이 났다.

“엄마, 너무 작은 생명이 죽었는데 절하려니까 웃겨?”

“아니, 아니...”

 

 

- 계속 -

 

 

 

 

 

* 위의 글은 에세이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지독한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완전한 제거는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 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니 점쟁이의 말이 떠오른다.

역술인 혹은 무속인.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그들로부터 여러 말을 들었다.

어른이 되고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점 볼 기회가 많았다.

먼저 결혼을 앞두고 거의 스무 군데 정도 본 거 같다.

시어머니께서 궁합이 좋지 않다고 해서 결혼을 반대하셨다.

그래도 남편이 완강히 버티자 점집 순회가 시작됐다.

이것은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는 방식과 같았다.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낼 때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시어머니는 점쟁이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점집을 전전하셨다.

당시 ‘추적60분’ 등 유명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나와 남편의 사주는 전부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나’라는 동일인의 사주팔자임에도 점집마다 상이한 해석이 내려졌다.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이

점쟁이의 소견을 엑셀로 도표화해서 어머니에게 제시하고

논리적 모순점을 따지기도 했다.

그 표를 나도 봤는데 기분 묘했다.

특히 ‘결혼 두 번 할 팔자’와 ‘명이 짧다’는 점괘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하면 일년 안에 헤어진다고 했다.

혼인신고에 잉크도 찍기 전에 예고된 이혼선고도 황당했지만

일찍 죽는다는 것은 더욱 실감나지 않았다.

일찍이 몇 살일까. 서른 살? 쉰 살? 죽음은 언제나 너무 빠른 죽음만 있는 건데.

정말이지 ‘마흔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영화라도 찍고 싶었다.

뭐라도 이루고 죽어야 ‘요절’이 될 텐데

준비 없이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냥 '사망'이라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한 차례 점집 소동을 겪고 소강상태로 몇 달을 보냈다.

어느 날 시어머니는 다른 점괘를 가져와서 결혼을 서둘렀다.

왕십리의 유명한 역술인 왈,

내가 돈복이 많다고 결혼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이란 중대사는 이성의 통제 하에 진행되지 않는다.

결혼은 우발과 비약의 힘으로 이뤄진다. 이미 도달한 사건의 형태로 다가온다.

어쨌든 큰 돈복도 큰 불화도 없이 살았다.

한해 두해 지날수록 점괘의 허구성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점쟁이의 말을 점점 믿지 않게 되었다.

해마다 신수를 보러 가는 발걸음도 점차 뜸해지셨다.

정초에 점 보러 안 가시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셨다.

 “보면 뭐하니. 맞지도 않는데.”


삶은 지속됐다.

시효가 다한 줄 알았던 십년도 넘은 점쟁이의 말.

이혼과 단명을 상기시키는 일들이 발생했다.

다 떼놓고 홀로 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몸부림치던 괴로운 밤이면,

온몸이 바닥을 뚫고 지하의 암흑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무서운 밤이면

점쟁이의 말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날이 밝고 달이 가고, 살림을 줄여 이사를 가고 엄마도 잃었다.

난 늙은 고아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주변에 그렇게 보였나보다.

아는 언니가 ‘좋은 무속인’이 있다며 한 번 가보라고 권해주었다.

내게 허튼 일을 시키기에는 너무 사려 깊은 선배였다.

언니는 자기가 지인의 소개로 그 점쟁이에게 난생 처음 점을 봤는데

신통하다고 했다.

복채도 형편껏 알아서 내면 되는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공부가 깊은 사람이니 부담 없이 인생상담 차원에서 얘기나 듣고 오라고 했다.


점집 가는 날.

바람에 잔가지 웅성대고 태양은 따가웠다.

눈부심을 피해 땅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걷는데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무슨 얘기를 한담.

소낙비를 맞고 나면 우산이 필요 없다. 나는 미련이, 욕망이 없었다.

궁금한 것도, 필요한 것도, 하고 지키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이 괴로움이 언제나 끝날까요?’ 라고 물어봐야 하나.

한편으로 약간 두렵기도 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도 시한부 선고가 내려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래서 후배를 데리고 갔다.

“나 무서우니까 같이 가주라”


육교 아래 초등학교 앞에서 전화를 했더니

무속인의 제자가 나와서 우리를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데려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점집 특유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전신을 슬며시 죄어왔다.

원래 해석하는 자가 권력자다.

내 운명을 풀어내는 그 말씀 앞에서 나는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잔뜩 위축된 목소리로 생년월일시를 말했다.

곧이어 한 달 전에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아는 언니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얼버무리는데,

순간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옆에 있던 후배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뒤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하얀 종이에 무언가를 계속 써내려갔다.

두 가지 중요한 얘기를 들었다. 그 중 하나가 줄초상이 난다는 것이었다.

“줄초상이 뭔가요?” 숨죽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입을 뗐다.

가까운 사람이 더 돌아가신다는 얘기였다.

통상 3년 이내에 초상을 또 치르면 그게 줄초상이랬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굿을 하라고 했다. 굿이라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비용이 최소한 600만 원 정도랬다.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거길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지워졌다.

나는 지하철 승강장 맨 끝에 앉아서 열차 몇 대를 그냥 지나쳐 보내고서야

가까스로 집에 왔다.


어차피 선택권은 내게 없었다. 600만원이 없었다.

난 내가 돈이 그렇게 없는 줄을 몰랐다가 그날 알았다.

갑자기 아이가 아파도 병원 갈 돈도 없겠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서글프고 막막했다. 저녁에 그곳을 소개시켜준 언니에게 결과를 묻는 전화가 왔다.

 “굿하라는데.....”

언니가 깜짝 놀랐다.

장삿속으로 그런 말할 사람이 아닌데 꽤나 심각한 모양이라고 걱정했다.

이틀 후 언니가 집으로 찾아왔다.


“예전엔 굿을 하면 그거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70집을 먹여 살렸대.

떡이랑 과일이랑 물품이랑 여러 가지가 많이 필요하잖아.

70집에 네 식구만 해도 280명이잖니.

굿을 해서 그렇게 보시를 베풀면서 자기의 업보를 푸는 의미도 있는 거라더라.

그 뜻을 새기는 게 중요한 거 같아.”

굿의 의미를 이해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언니는 엄마 사진을 한 장 달라고 했다.

종교가 없는 언니는 우리 엄마를 위해 100일 간 기도를 해주겠다고 했다.

평생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눠온 친구는 명상가인데,

신들도 레벨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자기 사부가 더 근원 신과 대화하는데 줄초상 안 난다고 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고마웠다.

 

 

 

그러나 나는 어쨌든 살아야했다.

우박이 쏟아지든 산사태가 일어나든

밥 짓고 빨래하고 살아갈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삶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닌 나의 하루를 모셔야했다.

나에게 닥친 우연에 저항하지 말고 운명을 회피하지 말고

삶의 요청을 수용하기로 했다.

적어도 280명과 따뜻한 밥 한 끼는 나누자는 의무를 나에게 지우고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의 허물어진 어깨를 훑고 가던 쓸쓸한 바람이 다시 분다.

긴 강을 건넌 기분이 든다.

다행히 줄초상은 나지 않았다.

사실 ‘굿’ 이라는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살아가는 삼년 동안 문득 조마조마했다.

그럴 때마다 280인 분의 거룩한 식사를 생각했다.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이 뜨겁게 자각되었다.

삶을 옹호하는 본능일까.

주위에  더 눈길을 돌리고 더 아우르며 마음 다해 살 수 있었다.


내게 삶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런 난해함을 삶의 일부로 껴안고 살아간다.

또 다시 내 앞에 물살 깊은 긴 강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쟁이의 말은 충분히 불우했으되

나의 몰락과 미망彌望을 도와준 바람의 말이었다고 말하게 된 지금에서야,

과거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말한 니체의 말을 내 것으로 삼는다.

 

 

 

- 계속 -

 

 

 

* 위의 글은 에세이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알림>  

 

『올드걸의 시집』의 은유 작가와의 만남-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시(詩)가 왔다”

 

 

사랑, 결혼, 육아, 일로부터 수시로 울컥하는 여자들에게~ 

시는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은유 작가의

시 읽고 글쓰는 방법론, 궁금해요?

궁금하면~ 이벤트 신청!!!!!!!

 

  

  * 일시 :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 9시

  * 장소 : 마포구립서강도서관 3층 세미나실

  * 대상 : 일반 30명 (신청 선착순)

  * 신청 :  (홈페이지) http://sglib.mapo.go.kr

              (전화) 02-3141-7053 

              (방문) 4층 사무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이 2013-04-2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정말 많은 이들에게 읽히기를 바랍니다.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저는 혼자 살아요”

“결혼… 안 하셨나봐요?”

“해봤어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대화다.

신선했다.

여자주인공의 이혼을 심각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렸다.

심지어 ‘해봤어요’ 할 때는 은수가 능력자로 보였다.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본,

그래서 삶의 다양한 면을 경험한 성숙한 인간형 말이다.

2001년, 이 영화가 나올 때만 해도 이혼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부정적이었는데,

허진호 감독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 주변에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다보니 이혼 비율이 높다. 돌싱남녀들.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자들의 경우 아이는 엄마에게 맡기지만 양육비를 꼬박꼬박 잘 준다.

애들 학원비만이 아니라 생활비 수준으로 충분히 준다.

그런데 여자들은 전 남편에게 양육비를 거의 못 받는다.

하나같이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 몫까지 생계와 육아의 총책임자가 되어 참으로 열심히 산다.

존경스러울 만큼.

 

 

 

 

 

 

난 혼자서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어서 남편이랑 헤어지지 못했는데,

한동안 혼자 살고 싶어서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결혼생활 십년이 지나면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닥쳤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던 남편이

고객과의 분쟁을 해결하느라 집 담보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을

3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가정경제가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아이와 갓 태어난 둘째 아이의 육아집중기를 통과했다.

심신이 지쳐있던 나는,

(지금 생각하니) 죄의식에 날로 피폐해져 가는 남편과 마찰이 잦았다.

그리고 불행의 드라마는 1부작으로 끝나지 않았다.

2년 후, 남은 사건의 불씨까지 제거하고 나자

집안의 돈도 삶의 에너지도 남편에 대한 신뢰도 모조리 바닥났다.

나는 인간에 대해 깊이 회의했다. 의리와 순정은 효력을 다한 것처럼 여겨졌다.

‘결혼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는 일’(율리히 백) 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바람은 오직 한 가지. 내 눈앞에 아무도 사람이 없었으면 했다.

이혼이 목적이라기보다 독립이 화두였다.

남편과 자식까지, 내 몸보다 큰 배낭 세 개쯤 짊어지고 사는 그 지겨운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애가 끓었다.

 

 

 

 

 

 

 

시부모님에게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드렸다.

나에게 미운 남편이라도

그분들에게는 귀한 자식이니 이해해주십사 청했다.

남편과 잠시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아들에게

‘아빠 없어도 엄마 말씀 잘 들어라’ 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신파적인 대사를 남기고는

현관문 뒤로 사라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가고 이주일이 흘렀다.

남편의 부재는 생각만큼 홀가분하지 않았고

나의 마음도 기대만큼 개운하지 않았다.

남편이 출장 가는 직업이 아니라서 연애기간 포함하면

어른이 되고부터 내내 붙어살았다.

그 없이 살려니까 불편했다.

지방취재가 잡힐 때면 더러 아쉽기도 했다. 특히 아이들이 문제였다.

아들은 말수가 줄고 풀이 죽어 지냈다.

별거라고 말하기 민망한 짧은 기간.

한 달 후 다시 남편은 귀환했다. 가라니까 갔고 오라니까 왔다.

그것이

그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자기 앞가림에 서툴지언정 언제나 내 뜻대로 살게 한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 계속 -  

 

 

 

  * 위의 글은 에세이집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알림>  

 

 

 

『올드걸의 시집』의 은유 작가와의 만남-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시(詩)가 왔다”

 

 

사랑, 결혼, 육아, 일로부터 수시로 울컥하는 여자들에게~ 

시는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은유 작가의

시 읽고 글쓰는 방법론, 궁금해요?

궁금하면~ 이벤트 신청!!!!!!!

 

  

  * 일시 :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 9시

  * 장소 : 마포구립서강도서관 3층 세미나실

  * 대상 : 일반 30명 (신청 선착순)

  * 신청 :  (홈페이지) http://sglib.mapo.go.kr

              (전화) 02-3141-7053 

              (방문) 4층 사무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구름에앉아 2013-01-17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생을 담은 한잔 물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그렇군요!^^

수이 2013-04-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는 일'
아 공감 이백프로- 라고 말하며 남편에게 말하니
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 분이 대신 해주었소- 라고,
이 쉐이가;;;;;;;; 라고 남편님에게 욕을 하고 말았네요 ㅠㅠ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