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나이든 여자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무얼 욕망하느냐고, 어떤 슬픔이 있느냐고 물었다

동네 꽃집을 지나는데 창문에 예쁜 글씨가 새겨져있다.
"우리 엄마도 한 때는 소녀인 적이 있었답니다."
발걸음이 멎었다.
뭐랄까. 애잔함과 서글픔과 허탈함이 차례로 밀려왔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애들한테 카네이션 달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저 문구에 쓰인 우리 엄마에 나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다.
어느 덧 내가 효(孝)마케팅의 판촉 대상으로 위로받는 처지가 된 게
못마땅했다.
그럼 뭐 지금은 시들었어도 예전엔 생기어린 꽃이었다는 건가?
고쳐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소녀일 때가 있답니다."

예전에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 노문희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녀의 담당구역인 건물 3층 복도 끝에 휴식공간이 있었다.
새의 둥지처럼 몸 하나 겨우 웅크릴 공간,
책상 하나 놓이니 꽉 차는 창고 같은 방이지만
다행히 벽면의 통유리 너머로 짙푸른 나무가 흔들려 운치를 더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스프링 노트가 정물처럼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학생들이 버린 노트를 주워서 일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넘기는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소녀얼굴의 스케치가,
마치 전혜린의 노트처럼 동경과 낭만으로 일렁였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까맣게 염색한 보글보글 억센 파마머리에
울퉁불퉁 힘줄 튀어나온 마른 손등에
소매통 넓은 파란색 작업복을 걸친 청소부.
예순 살의 그녀가 감수성 주체로 여기 책상에 앉곤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 엄마도 가을이면
단풍잎 은행잎을 주워서 식탁유리 밑에 끼워놓곤 했던 생각이 났다.
엄마가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엄마가 주운 것은 낙엽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살면서 흘린 것, 놓친 것, 떨궈진 것들을 낙엽에서 보았던 게 아닐까.
잃어버린 당신 시간을 모으듯
몸을 구부려 줍고 부서질세라 쥐고 고이 간직하는 동안
엄마는 가을을 통과하는 소녀였던 거다.

나는 이십대 초반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았다. 엄마로 오래 살았다.
남들은 나보고 젊은 엄마라고 말했지만 나는 일찍 엄마가 된 소녀였다.
엄마 아닌 생에 대한 갈망이 컸다.
앞치마 풀어버리 듯 엄마의 옷을 간단히 벗어버리고 싶었다.
체념인지 적응인지 마흔에 다다르자 심신의 변화가 왔다.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가나 봐요’(최승자「길이 없어」)
상태가 되었다.
그럭저럭 살만했고 얼렁뚱땅 살아졌다.
하지만 심신의 변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체력의 저하와 감각의 퇴화가 그래프처럼
항목별로 고르게 나타나는 건 아니었단 말이다.
나는 여전히 왕성하게 분열중인 세포를 발견했다.
두루두루 참을 만하다가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
불쑥 튀어 오르는 힘, 내 피만 알아차리는 저항.
그것은 한숨이나 눈물 같은 울컥함으로 나타났다.
나는 불행을 예민하게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적 자아로 회귀하려는 어떤 경향성일 것이다.
일상의 아수라장 안에서도
뭉그적뭉그적 나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때마다 나는 어떤 소녀와 대면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올드걸은 고정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니까
피부에 잔주름 없애고 명품 몸매 가꾸어 ‘영우먼’되려는 욕망처럼
눈가의 물기와 사유의 탄력을 잃지 않는 ‘올드걸’이 되려는 욕망도 있다.
그런데 올드걸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영우먼은 미용산업, 성형산업, 의류산업을 거쳐야 만들어지므로
매스컴에 의해 떠들썩하게 알려지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반면,
노트 하나 시집 한권이면 족한 올드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회의 거미줄 같은 자본시스템을 경유하지 않는 존재는
발굴되지도 부각되지 않는 법이니까.
또한 일상생활에서 엄마역할로 기능하면
딱히 드러날 기회가 없기도 하다.
나이든 여자를 마주하고 당신은 꿈이 뭐냐고, 무얼 욕망하느냐고,
어떤 슬픔이 있냐고 물어본다는 건 영 어색하다.
나도 엄마에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보통명사 ‘엄마’의 사적영역은
한때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우리 모두에게
상상불가능의 지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걸은 살아있다.
누군가 나에게 올드걸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주체’라고.
- 계속 -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 <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 위의 글은 작가 은유의 에세이집『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