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나는 오늘,  행복없이 사는 훈련을 시작했다    

 

   

 

 

 

 

 

 

서른 중반 즈음부터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삶이 복잡계 수준으로 얽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이성복)을 지나오면서

나는 더 이상 한갓 취향으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기울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보시기와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TV는 저 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 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 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30분 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의 정체가 무언지는 몰랐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가 소설에서 봤다며

‘조선조 사대부 여인에게는 시가 짓기를 금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책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은 항상 숙명과 같은 엄숙한 얼굴로 가시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순치된 가축처럼 고분고분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남권 사회의 순리다. 가장 무난한 방도는 회의하지 않는 일이다.

남권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회의는 독약이나 같다.

조선조 사대부 여인들에게 시가 짓기를 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 눈뜨는 것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 아닌가.

 -『달아 높이곰 돋아사』1권, 105쪽,  이영희, 두산동아, 1997년

 

 

 

 

 

 

 

 

 

 문학에 눈 뜨는 일은 회의에 눈 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 뜨는 일은 존재에 눈 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할 뿐이다.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불가능성이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 재능’(니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게 내려간다.

옥타비오파스의 말대로 시는 존재의 심층에 거주한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이다.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어딜 가나 치유와 긍정의 말들을

사나운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얼굴에 들이대어 삶에 눈멀게 할 때,

시는 은은히 촛불 밝혀 삶의 누추한 자리 비추어주니까.

배신과 치욕과 절망과 설움이라는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절반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덮어두는 그 구질구질한 기억의 밑자리를

시는 끝내 밝힌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

그래서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황동규)인 것이다.

 

 

     - 계속 -   

 

 

 

 * 위의 글은 작가 은유의 에세이집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알림>  

 

 

『올드걸의 시집』의 은유 작가와의 만남-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시(詩)가 왔다”

 

 

  사랑, 결혼, 육아, 일로부터 수시로 울컥하는 여자들에게~

  시는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시를 읽을 때마다 경험은 발생한다.

  은유 작가의

  시 읽고 글쓰는 방법론,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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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 4층 사무실 (오전 9시~ 오후 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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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4-2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고 책을 읽고 회의하고 또 회의하고-
이른 아침부터 울컥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