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저는 혼자 살아요”
“결혼… 안 하셨나봐요?”
“해봤어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대화다.
신선했다.
여자주인공의 이혼을 심각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렸다.
심지어 ‘해봤어요’ 할 때는 은수가 능력자로 보였다.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본,
그래서 삶의 다양한 면을 경험한 성숙한 인간형 말이다.
2001년, 이 영화가 나올 때만 해도 이혼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부정적이었는데,
허진호 감독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 주변에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다보니 이혼 비율이 높다. 돌싱남녀들.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자들의 경우 아이는 엄마에게 맡기지만 양육비를 꼬박꼬박 잘 준다.
애들 학원비만이 아니라 생활비 수준으로 충분히 준다.
그런데 여자들은 전 남편에게 양육비를 거의 못 받는다.
하나같이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 몫까지 생계와 육아의 총책임자가 되어 참으로 열심히 산다.
존경스러울 만큼.

난 혼자서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어서 남편이랑 헤어지지 못했는데,
한동안 혼자 살고 싶어서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결혼생활 십년이 지나면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닥쳤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던 남편이
고객과의 분쟁을 해결하느라 집 담보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을
3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가정경제가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아이와 갓 태어난 둘째 아이의 육아집중기를 통과했다.
심신이 지쳐있던 나는,
(지금 생각하니) 죄의식에 날로 피폐해져 가는 남편과 마찰이 잦았다.
그리고 불행의 드라마는 1부작으로 끝나지 않았다.
2년 후, 남은 사건의 불씨까지 제거하고 나자
집안의 돈도 삶의 에너지도 남편에 대한 신뢰도 모조리 바닥났다.
나는 인간에 대해 깊이 회의했다. 의리와 순정은 효력을 다한 것처럼 여겨졌다.
‘결혼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는 일’(율리히 백) 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바람은 오직 한 가지. 내 눈앞에 아무도 사람이 없었으면 했다.
이혼이 목적이라기보다 독립이 화두였다.
남편과 자식까지, 내 몸보다 큰 배낭 세 개쯤 짊어지고 사는 그 지겨운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애가 끓었다.

시부모님에게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드렸다.
나에게 미운 남편이라도
그분들에게는 귀한 자식이니 이해해주십사 청했다.
남편과 잠시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아들에게
‘아빠 없어도 엄마 말씀 잘 들어라’ 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신파적인 대사를 남기고는
현관문 뒤로 사라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가고 이주일이 흘렀다.
남편의 부재는 생각만큼 홀가분하지 않았고
나의 마음도 기대만큼 개운하지 않았다.
남편이 출장 가는 직업이 아니라서 연애기간 포함하면
어른이 되고부터 내내 붙어살았다.
그 없이 살려니까 불편했다.
지방취재가 잡힐 때면 더러 아쉽기도 했다. 특히 아이들이 문제였다.
아들은 말수가 줄고 풀이 죽어 지냈다.
별거라고 말하기 민망한 짧은 기간.
한 달 후 다시 남편은 귀환했다. 가라니까 갔고 오라니까 왔다.
그것이
그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자기 앞가림에 서툴지언정 언제나 내 뜻대로 살게 한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 계속 -
* 위의 글은 에세이집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알림>
『올드걸의 시집』의 은유 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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