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어느 겨울.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한 시간 가량 운전을 해서 집에 왔다.
남편과 아이들은 잠들고 나는 거실에 멍하니 있었다.
두 눈만 꿈뻑꿈뻑. 모드변환 중이다.
몸에서 식용유 냄새랑 트리오 과일향이 빠져나가길,
다시 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이 복잡했다.
일체유심조를 이루고자 반야심경을 읽는 심정으로 시집을 뒤적거리는데
문자가 왔다.
"뭐하니?"
"그냥 있어."
술자리를 마치고 가는 길인데, 뭔가 아쉬워서 연락했다는 그.
문득 마음이 동했다.
자기재건 본능인지 떠남의 욕망인지 모를 기습적인 충동이 일었다.
우리는 술꾼처럼 ‘딱 한잔만’ 하기로 했다.
그는 2호선 반대방향으로 갈아타고 되돌아오고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양화대교를 건넜다.
합정역 4번 출구에서 상봉했다.
베시시 웃고는 사뿐히 팔짱을 끼고 홍대 쪽으로 걸었다.
얼얼한 바람이 전신을 휘감았다. 정신이 들고 생기가 돌았다.
호프집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시댁에서 술집으로 배치가 바뀌니까 존재가 달라진다.
비록 무릎 나온 추리닝의 꾀죄한 차림이지만,
재투성이에서 신데렐라로 변신한 것 같았다.
역할이 아니라 영혼이 만나 마주하니 좋았다.
해야 할 얘기와 하지 말아야할 얘기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그렇게 감정의 평형상태를 즐기는데 자꾸 목 앞쪽이 껄끄러웠다.
목걸이도 안 했는데 이게 뭔가 싶어 만져봤더니 스웨터 상표였다.
황급히 나오느라 윗도리의 앞뒤를 바꿔 입은 거다.
‘나 다급했나…’
웃기면서도 부끄러웠다.
화장실 가서 고쳐 입고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우리는 고속버스 승객처럼 나란히 앉아 떠들다가
고개 뉘여 그의 어깨에 잠시 기대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얼굴에 차고 다순 알갱이가 톡 떨어졌다.
눈, 눈발이 날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영화 <러브레터> 주인공처럼
고개가 젖혀지고 두 팔이 벌려졌다. 나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 싸락눈 깔린 하얀 아스팔트를 밟으며 다시 합정역까지 걸었다.

다시 겨울. 삼선동에 이사 오고는 대학로를 한 번도 못 갔다.
전에는 업무수행 혹은 친교활동을 위해 종종 들르던 동네다.
가까우니 멀어진다.
대학로에 있는 그에게 그리움 담아 문자를 넣었다.
"보고잡소."
"나도 보고잡소."
급작스럽게 삼자회동이 성사되어 한 시간 뒤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그가 데려간 곳은 ‘민들레처럼’.
박노해의 시 제목인데 술집 간판으로도 어울렸다.
강남에서 근무하는 그의 후배는 벌써 와 있었다. 택시타고 왔단다.
“너 다급했니…”
키득키득.
나는 안다.
누구를 만나고 싶은 자가 아니라 어디로 떠나고 싶은 자는 달린다. 전속력으로.
초과노동과 인간소외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땅으로 한달음에 간다.
그곳은 편안한 소파에 안주가 푸짐했다.
도토리묵, 파전, 과일샐러드, 북어포, 오뎅탕이 이만원이란다.
배경음악도 친숙한 7080 노래가 흘렀다.
처음처럼 각 1병씩 마시고 수다도 비우고 술집을 나갔다.
예기치 못한 선물. 눈이 날린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민들레홀씨처럼 지상에 내려앉지 못하고 공중을 휘젓는 눈.
그해 겨울. 용산참사 노제가 열리던 날도 그랬다. 민들레처럼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 펑펑 그칠 줄 몰랐고
남일당 앞 스피커 차에서는 ‘민들레처럼’이 연신 울려 퍼졌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온몸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구슬픈 가락 따라 눈사람이 된 유족과 검은 영정사진이 무겁게 흘러갔다.
거침없이 피어나 짓밟힌 사람들.
고조되는 목소리.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오..”
언젠가 봄은 온다고들 말하지만, 당사자에게 겨울은 너무 길고 춥다.
구체적인 아픔을 무화시키고 봉합해버리는 상투적인 결말이 거슬렸다.
우리는 봄을 기다리기보다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나는 법을 노래해야하는 게 아닐까.
마디마디 분절되어 살갗에 닿던 민들레처럼 말이다.
그는 가고 둘은 남았다.
우리는 시야가 흐려지는 몽환적인 눈을 맞으며 학림다방으로 향했다.
창 넓은 찻집에서 꼭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내가 우겼다.
팔짱끼고 걷다가 친구가 뒤뚱 넘어지려는 걸 구제해주었다.
“이런 낭만지수 100% 외출지수 50%인 날,
옆에 있는 사람이 나여서 괜히 미안하다.”
“아냐. 고마워. 나 혼자였으면 분명히 넘어졌을 거야. 얼마나 서글펐겠어.”
애인 있다고 넘어질 때 항상 안전한 건 아니며
발 걸고 같이 넘어지는 놈들도 많다고 위로했다. 애잔한 말들.
비혼이어서 쓸쓸하고 기혼이어서 아니 쓸쓸하진 않다. 인간이어서 적적한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은 인간에게 가장 이로운 존재라고 말했나 보다.
어쨌든 인간의 존재조건인 고독을 등짐 진 두 여자는
좁고 가파른 학림다방 계단을 올랐다.
여전히 달달한 낭만주의 클래식이 흐르고
일제강점기 소설가의 방처럼 담배연기 피어나고
레코드판 즐비하며 소파는 나란하다.
<계몽영화>에서 남녀가 맞선보던 국제중앙다방 세트장 분위기가 마냥 정겹다.
통유리에 안긴 풍경은 넉넉하고
커피는 일품이고
손님은 만석이고
우리들 대화는 처량하다.
"회사 그만두고 싶어 죽겠다. 아주, 아주, 죽을 힘 다해서 짜내고, 짜내서 다니고
있어. 설에 집에 내려갔더니 나 결혼 안 한다고 엄마가 걱정을 엄청 하시는데
회사까지 그만두면 너무 불효 같아서."
"그렇겠다. 번역만 해서는 생계가 어렵지?"
"아는 사람이 작년에 다섯 권 번역했는데 연봉 2천이래. 그만큼 하려면 하루에
10시간 이상 매일 노동해야해. 너는 그쪽 일은 하나도 안 해?"
"응. 요새 글쓰기 싫으네. 사람은 어떤 맹목적인 확신이 있어야 사나봐. 그 거울을 잃어버리니까 맨 얼굴의 내가 보여서 괴롭다."
"그래도 체력 될 때 써라."
"그래야지."
"연령주의에 갇히면 안 되겠지만 일도 사랑도 때가 있는 거 같아. 확실히 남자는 나이 들수록 만나기 더 어렵고."
"근데 사십대를 같이 보내서 한 십년 추억을 공유해야 노년에 말벗을 해도 하지 않을까. 올해는 적극적으로 남자를 만나봐."
"그래야할 텐데 사람이 없네…."
돌림노래같은 주제들. 결론 없는 수다. 오로지 과정으로만 존재하는 삶과 닮았다.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는 테이블에 있는 정사각형 영수증으로 종이학을 접었다.
"아직도 종이학 접을 줄 아니?"
"그러네. 몸이 기억하나봐. 손이 저절로 접은 거야."

데이트 생활자의 겨울. 근래 들어 근무태만이다. 혼자 노는 기술을 알아버렸다.
이를 테면, 파울 첼란의 시집을 사고는
카페에 갔다가 독일풍으로 뮌헨 빵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된장녀 짓을 일삼으니 지루하진 않다. 늘 그랬다.
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바늘 하나로도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생명이고
눈송이 하나라도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러니 이 헛됨을 ‘누리면서 견딜’ 수 있는 한 번의 기쁨, 한번의 감촉,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필요하다.
합정동에 두고 온 그대생각. 남일당에 두고 온 민들레처럼.
학림다방에 두고 온 종이학. 팔뚝에 저장된 체온 같은 것들…
나의 무제한적인 부(副), 눈과 함께 서리서리 쌓인 시간의 기억들.
그것으로 겨울을 나고 일생을 버틴다.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으니까.
- 계속 -
* 위의 글은 에세이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