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맡기고 산다

 

 

 

 

 

 

 

오래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응당 그래야한다 여겼다.

골동품 같은 우정, 오래 가는 사랑, 한결 같은 마음.

세월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이다. 맞다.

그런데 친구의 경우 한번 마음의 물길 트면 어떤 계기가 없는 한

일부러 단교할 일도 없다.

그런데도 세계 표준시간 경과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가는 since에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철없을 땐 만남의 횟수마저도 중요했다.

다다익선. 일년에 한 번도 안 만나면 우정이 식었다 여겼다.

때로 마음이 심드렁해도, 그러니까 낡은 싱크대 문짝처럼 마음이 덜렁거려도

멀쩡한 듯 닫아놓고, 가급적 열어보지 않으며 계절을 넘기기도 했다.

서른 넘기고 인생사 복잡계 수준으로 얽혀 수년간 못만나도

10년 지기, 20년 지기 인연의 마일리지는 스스로 강물처럼 불어났다.

오래된 만남=고귀한 인연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묻게 된다.

오래된 관계가 꼭 좋은 건가? 나는 왜 오랜 만남에 가치를 두었을까나.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부분을 보낸다.

엄마, 아빠, 형제자매, 학교의 선생님, 친구들, 직장 동료.

내가 골라서 관계망을 형성할 수 없다.

이게 얼마나 폭력적인 상황인지 모른다.

미우나 고우나 얼굴 보고 살아야한다는 것.

생의 번뇌의 8할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친구는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고마운 대상이다.

상대적으로 책임이 적고 향락이 크다.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관계의 감정 노동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영역이 ‘친구’다.

사랑은 때로 무간지옥의 고통을 수반하므로 빼기로 한다.

암튼 오래 된 친구일수록 더 여유작작하다.

결국 익숙함.

그런데 편안한 게 꼭 좋은 것 같지는 않다. 길들여지니까. 둔감해지니까.

니체도 말했다.

친구는 ‘야전침대’가 돼주어야 한다고.

오리털 이불같은 친구라면 마냥 잠들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

딱딱한 침상에서 잠시 피로만 풀고 다시 떠나도록 절제된 우정을 권유했던 셈이다.

 

 

 

 

 

요즘 잇달아 ‘일시정지’였던 인연들과 상봉했다.

그 중에 내가 선생님이라 부르던 그.

미국에 유학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귀국소식을 들었는데 훗날 극적인 상봉을 위해 굳이 연락하지 않다가

용건이 생겨서 전화했다.

“선생님. 저 누군지 알겠어요?”

“당연히, 알죠!”

 퍼즐조각을 맞춰보니 3년만의 재회인데 난 10년 쯤 된 것 같았다.

전화는 사랑을 싣고.

상봉의 감동을 나누었다.

아직도 그 동네 사느냐. 아들은 많이 컸겠다, 우리 그 때 그랬지 않느냐 등등.

10년전 처음 만나 집이 가까워서 가끔 만나 영화도 보고

어느 눈 내리느 겨울엔 술마시고 2차로 우르르 몰려

그의 집에도 놀러가고 그랬었다.

기억의 통로를 통해 들어간 과거.

거기서 좋다고 놀고 있는 이십대 처자가 보이지 뭔가.

어설프기 한량없던 나. 괜히 눈물이 나려해서 혼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고 지금은 누구와 일하고 무엇에 기쁨을 느끼고 산다고

말하는데, 내 입으로 나를 설명하려니 어색했다.

내 삶이 내 살 같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막 살지는 않았다는 안도감과 더 잘살아둘 걸 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나에 대해 느끼는 낯섦.

그 긴장이 짜릿했다.

친구라고 붙어있는 게 능사는 아니구나 싶다.

같이 뭉개는 시간의 양, 묵은 정도 의미 있지만

그보다는 상호 촉발을 일으키는 강도, 우정의 차이화 능력이

인연을 키우는 힘 같다.

관계의 지속이거나 우정의 안식년이거나 인연의 소멸이거나.

그렇게 멈추고 바뀌는 것들 속에 나를 맡기고 산다.

인연의 지형도가 인생의 내신성적표이다.

 

 

 

- 끝 -

 

 

 

* 그동안 『올드걸의 시집』을 사랑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8회를 마지막으로 『올드걸의 시집』은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 위의 글은 에세이 『올드걸의 시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글: 은유 

1971년 서울 태생. 사람과 사건 많은 도시에 살면서 생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다. 사보, 웹진, 잡지, 책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생활밀착형 작가다.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R’ 에서 글쓰기강좌와 시(詩)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밖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 등에서도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함께 했다.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올드걸의 시집>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몸에서 맴돌던 바로 내 얘기”라며 호응과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그동안 서랍에 고이 감춰뒀던 글을 꺼내어 세상에 내놓게 됐다. 지은 책으로는 MBC <남극의 눈물> 송인혁 촬영감독과 낸 사진에세이『황제처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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