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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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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는 중에 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한번은 논의 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친구 경상이도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한국이 싫다며 캐나다로 떠난 지 벌써 십오 년이나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2년 전 이맘때였다. 그 사이 살은 더 불어 있었고 농을 하는 말투나 행동은 고등학교 시절하고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달라진 것은 이마에 주름살이 더 깊게 파였고, 그 주름살만큼 인생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그 이마에 새겨져 있었다. 그의 개똥철학이 그의 이국 생활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캐나다로 이민을 간 그 친구는, 처음에는 타국에 대한 로망이라고 할까, 영어를 좋아했던 그 친구는 그렇게 말없이 떠났다. 속내를 보면 한국에서의 결혼 생활이 그리 순탄치가 않았다. 이혼이 그에게 커다란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그때는 이민만이 살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무작정 떠난다고 해서 처음에는 말렸다. 그러나 그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나에겐 그를 말릴 수 있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계나’ 역시 한국이 싫다면 호주 시드니로 떠났다. 한국에서의 경쟁이 싫어서였다. 출근 길,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끔직 하다고 한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회사에 가면 더한 경쟁이 그녀를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는 보잘 것 없는데 그 치열한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그녀가 생각한 만큼 편하지가 않았다. 경상이의 말도 이와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래서 일찌감치 이민을 간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자기주장을 펼쳤다. 그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은 데 아무 연이 없는 곳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게 단점이었다. 외로움, 그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동반자가 있던가, 그 지역의 사람들과 친분을 두텁게 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했다.

 

이 말은 타국의 생활이 그만큼 녹로지 않다는 얘기다. 한국이 싫어서 떠났지만 그 곳에 또 다른 울타리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 울타리를 제거하기 위해, 그는 2년 전 결혼할 목적으로 한국 땅을 밟았는데 그 조차도 쉽게 성사가 되지 않았다. 약혼까지 했었는데 갑자기 여자 쪽에서 아무 이유 없이 파혼하자는 통보를 해왔다고 했다. 여자 아버지가 갑자기 반대를 해서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애기다. 참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고 친구의 얼굴을 보니까,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헤어질 것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 친구는 그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 물론 혼자 산다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또한 소설속의 계나는 치열한 경쟁이 싫어서 한국을 떠났지만 이 세상에 경쟁이 없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잘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항상 자기가 처한 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한국이라는 울타리는 벗어났지만 결국 또 다른 울타리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누구나 삶은 이와 같을 것이다.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는 그 해결을 ‘가젤과 사자의 연대’라는 표현을 했다. 그 말은 어디에나 지배자가 있으면 지배를 받는 쪽이 있는데, 그 양자가 연대를 해서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는 얘기다. 혹자는 한국에서의 여러 사건들(메르스, 세월호 참사 등) 때문에 그게 싫어서 떠나고, 또 다른 사람은 경쟁, 신분 차이가 싫어서 떠나고, 다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사연들이 있다. 과연 그들이 떠나는 이유를 그들에게만 전가할 것인가. 누가 이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것인가. 아님 원하는 대로 살라고 내벼려 둘 것인가. 1프로의 지배자와 99프로의 피지배자는 과연 연대를 할 수 있을까. 피지배자끼리 연대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지배자와 연대가 필요한 것은 분명한데 그걸 과연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가 문제다. 서로의 공감대가 형성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만 한다. 물론 그러한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 그들이 한국이 싫다며 이 나라를 떠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 나라의 진정한 군자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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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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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20) 치사율 40% 메르스 환자 국내 첫 발생

(2015. 05. 28) 8일만에 환자 7명 발생…메르스 확산세 '우려'

(2015. 06. 01) 메르스 환자 첫 사망

(2015. 06. 13) 4차 감염자 첫 발생... 메르스 환자 138명, 사망자 14명

(2015. 06. 17) 격리대상자 6,729명 최고조

(2015. 07. 21) 현재 누적감염자 186명, 사망자 36명

 

치사율 40% 메르스 환자 2015년 5월 20일에 국내에 첫 감염자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6월 17일 격리대상자 6,729명 최고조가 되었고, 7월 21일 현재 누적감염자 186명, 사망자 36명에 이르렀다. 위 내용은 그와 관련된 내용을 일자별로 요약한 것이다. 거의 재앙 수준이다.

 

필립로스의 소설 ‘네메시스’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메르스와 비슷한 폴리오라는 유행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구성되었다기보다는 실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느 신문의 한 기사를 읽는 듯 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서도 모래폭풍이 사막의 모래를 핥기고 가듯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이미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그 폭풍의 끝자락에 와 있다. 경험하지 않아도 될 메르스는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파괴력을 지닌 괴물이었고 주위 사람들의 기침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과연 그와 같은 질병을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폴리오와 메르스, 사스 등의 전염병은 우리가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그런 질병이 아니다. 전염병의 발생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 실정이다. 이름이 부여된 전염병 말고도 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전염병이 우리의 목숨을 도사리고 있다. 이런 질병은 왜 나타나는가. 그에 대한 정확한 방역대책은 없는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 말고는 우리가 손 쓸 방도가 없을까. 과연 누구의 죄 때문에 이와 같이 사람의 간담을 녹이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인가.

 

‘네메시스’의 내용 중 다음 같은 것이 있다. ‘비극이라는 것, 그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비극을 죄로 바꾸어야만 했다. 벌어진 일에서 필연성을 찾아야만 했다. 유행병이 생겼고 그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는 왜냐고 물어야만 한다. 왜? 왜? 그것이 의미 없고, 우연이고, 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급격히 증식하는 바이러스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 순교자는, 왜에 미친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더 깊은 원인을 찾으며, 그 왜를 하느님이나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하거나, 아니면 신비하게도, 불가사의하게도, 그 둘이 무시무시하게 합쳐져 생겨난 단일한 파괴자에게서 찾는다.’라고 하면서 주인공 자신의 무책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을 무너뜨린 진짜 네메시스는 그의 가혹한 의무감, 병적인 죄책감, 엄격한 선에 대한 집착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위 소설에서와 같이, 폴리오가 발생했을 때 자기가 가리키고 있는 아이들을 버려둔 채 혼자만 살겠다고 그 지역을 떠난 주인공이 죄책감에 힘들어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렇듯 개인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한 나라의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가 개인 한 사람보다도 못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 보다도 정부의 무능력, 권력가들의 무책임이 문제다. 질병이야 어느 곳에서나 발병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것을 대처하는 위정자들의 문제의식이 없는 게 문제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질병에 개입하지 않을까, 라고만 탓할 수 있을까. 현재 대한민국은 선장이 없이 태평양 한 가운데 둥둥 표류하는 볼품없는 배와 같다. 그 배를 조정해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선장이 없는 것이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허둥지둥 하는 모습은 가히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우리 사회는 계획이 상실한, 무계획이 계획인 것처럼 대충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다. 누구하나 그 잘못을 똑 부러지게 고치는 의사하나 없는 병실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일반 국민을 격리대상자로 볼 것이 아니라 정부나 위정자들을 격리해야 하지 않을까.

 

‘계획상실사회’, ‘무책임이 당연한 사회’, ‘볼품없이 표류하는 배와 같은 나라’. 이와 같은 표구가 우리사회를 대신하고 있는 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 계획 없이 흘러가도록 방치하면 안 된다. 사전에 예방을 못하더라도 적어도 일이 터지면 진정성 있는 컨트롤 타워를 세워 제대로 수습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 이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양보는 다른데서 하고 이런 사건이 터지면 신속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자격이 없는 리더는 자발적으로 물러나야 한다. 끝까지 버텨봤자 둥둥 떠다니는 배와 함께 좌초할 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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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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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롤로코스트에 비유를 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올라가다가 정상에서 내리꽂는 그 요상한 물체.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가다가 꼭대기에 이르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쫄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 물체를 타면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요동치는 가슴을 달래기 바쁘다. 몇 초 안되는 그 짜릿한 순간을 맛보기 위해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선다. 함성 소리에 따라 목을 뒤로 젖히고 하늘에 매달려 있는 그 요상한 물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지구인들을 감상하는 묘미는 직접 타는 것 못지않게 즐거움을 준다. 이러한 즐거움을 주는 덕분에 청룡열차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놀이기구가 되었다. 함성을 지르게 하는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정상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 스릴 만점의 순간을.

 

스키를 타듯 전력질주하며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흡사 한 마리의 용을 연상케 한다. 그 순간의 짜릿함은 잠시지만 여운은 오래 남는다. 남는 것은 여운뿐만이 아니다. 오줌을 지릴 것 같은 순간에 천하장사의 힘이 손아귀에 들어간다. 공포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 덕에 손과 어께의 통증은 제 2의 선물이 된지 오래다.

 

삶이한 참으로 묘하다. 청룡열차처럼 짜릿함을 맛볼 수 있는 순간도 주지만, 우울증 환자처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거의 이 세상을 다 산 표정을 짓게끔 하는 것은 마력을 지닌 마술사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포물선과 같다. 단지 그 포물선의 주기가 점점 빨리 찾아온다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오면 좋으련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이 포물선의 또 하나의 다른 모습은 우리를 낙천주의로 살다가 어느새 비관주의로 돌변하게도 한다. 이 소설은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인생의 굴곡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를 찾아내는 체스 클럽의 멤버들과, 역시 어수선한 시대 정세에 휘말려 평탄치 않은 사춘기를 보내며 성장해가는 미셸. 미셸은 이 시기를 체스 클럽에서 만난 소중한 우정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나 또한 지금까지 많은 포물선을 그리며 그 포물선의 상한점과 하한점을 여러번 찍었다. 과연 이처럼 평탄치 않은 인생을 누가 지탱해 주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런 방점을 여러 차례 찍었지만, 그 순간이 되면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특히 하한점에 머물 때는 정말 사이코가 되는 느낌까지 든다. 이 또한 나의 성격 탓이겠지만, 정말 대책이 서지 않는다. 포물선의 상한점에는 희망과 사랑이 존재하지만, 하한점에는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한다. 땅 밑으로 잡아끄는 마력이 끝없는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시간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이럴 때는 시간이 만병통치약이 된다.

 

이 소설에서는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한다. 맞다. 그것이 정답이다. 이걸 누가 모르겠는가. 어는 한 순간에 감정이 폭발할 때는 이런 자제력이 생기지 않지만 말이다. 조절이 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뒤늦게 후회하고 아파한다. 반복의 연속이다. 폭발까지 가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지만, 그 인내의 한계라는 바닥이 금방 드러난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그 한계를 뛰어 넘기에는 아직 성품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말대로 희망의 끈은 놓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는 이런 극한을 이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이런 점은 극복해야만 한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극복하고 싶다. 나의 인간성을 되찾고 싶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더 버틸 수 있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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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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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은 나에게는 친숙하다. 이 책의 작가 줄리언 반스는 탐정소설의 진미를 보여주었다. 이 책은 영국사회의 가치를 성실히 따르며 가장 영국인답게 살아온 인도계 혼혈인 조지와 그가 겪는 사회적 편견과 부조리에 맞서 자신의 불익과 희생을 감내하고 나섰던 시대의 지식인 아서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실존인물에다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누구도 탐낼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탐정소설은 어릴 때 서부영화를 보는 듯하다. 아무도 없는,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사막에서 총 한 자루에 그들의 목숨과 바꾸어야 하는, 그야말로 멋있는 남자들이 세계. 먹고 먹히는 적자생존의 세계를 이 책에서도 발견했다. 땀과 가죽으로 버무려진 남자들의 세계. 그들의 진정한 우정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19세기 후반의 영국, 아서와 조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성장한다. 아서는 에든버러의 남루하지만 고상한 가정에서, 조지는 스태퍼드셔 촌구석의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늘 ‘무언가’를 보고 싶어 하고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진리’와는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기를 좋아했던 아서는 당대 가장 유명한 소설가가 된다. 반면에 목사인 아버지의 말씀만을 진리로 믿고 산 “수줍고 성실한 소년이며, 타인의 기대를 예민하게 감지”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했던 조지는 이름 없는 사무변호사로 살아간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당시 신문들마다 ‘그레이트 웨얼리 잔학행위’라는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된 일련의 사건이었다. 마치 코난 도일이 창조한 셜록 홈스 시리즈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긴장감 넘치는 수사과정과 사건의 이면을 찾아들어가는 심리묘사는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또한 수사과정에서 갈등하고 주저하는 조지와 결단하고 행동하는 아서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갈등은 두 남자가 그간 얼마나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치열한 삶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즉 사건을 추리하고 추적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살아왔던 환경은 다르지만 그들에게 목표가 주어졌고, 그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 판 멋들어지게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과연 그들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탐정소설은 흥미진진하다. 서부의 개척자들이 그들의 모험을 위해 황량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서부의 사나이가 그들의 땅을 개척하듯 두 주인공들은 그들의 목표로 달려 들어간다.

 

그렇게 전혀 다른 두 남자가 만나 9개월 동안 매달렸던 사건은 불완전하게나마 일단락이 되고, 아서와 조지는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23년 후, 아서는 조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여전히 미혼인 사무변호사로 생활하던 조지는 신문에서 아서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보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조지는 크게 흔들린다.

 

이처럼 심리적인 묘사를 소설속의 갈등으로 그려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탐정소설의 알 수 없는 부분을 연상케 한다. 어떤 사건을 맡아서, 끝내는 그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형사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두 사람의 심리적인 갈등에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고 함께 그 순간을 맞이한다면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운명적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드라마 같은 소설을 여기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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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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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가족여행을 해외로 갔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증세가 점점 심해짐을 느낀다. 이런 불안 증세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탓이 크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착륙을 할 때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착륙이 안전하게 착지하자 안도감을 느꼈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온통 사건들로 빽빽하게 지면을 채우고 있다. 오히려 사건이 없는 날은 허무하기까지 하다. 왜 이럴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비이상적인 사건, 사고들을 즐겨하는 것 같다. 정상적인 뉴스거리는 더 이상 존재 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갈등은 심각하다. 그 중에서 아동 학대, 교육 불평등, 계급 격차, 노동 착취, 빈곤 등 많은 사회적인 병폐는 누구 하나 반대를 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주위에 방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방임하는 것이 우리의 현 주소이다.

 

이 소설은 구차한 삶을 소중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것은 친구의 부고를 듣거나(「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지독하게 가난한데 홀로 아이를 키운다거나(「관통」) 아동 학대를 우연히 목격하는(「이창」) 등 현실에서 운 나쁘면 겪을 법한 일이다. 모든 걸 녹이는 산성비가 내린다든지(「식우」), 감정을 착취당하던 ‘을’들이 덩굴식물로 변해버리는 전염병이 마침내 창궐하는(「덩굴손증후군의 내력」) 것처럼 비현실적인 일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이창」에서는 당신은 개인적인 관심사를 자꾸 있어 보이게 포장하려 들어. 행위의 본질은 대동소이한데 거기 자꾸 논리와 이유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이라 자위하고 싶은 거지, 라며 비아냥거린다. 무슨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처럼 우린 이런 자기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자기 합리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을 인정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관계가 성립한다.「어디까지를 묻다」에서는 우리는 인간인데 어째서 오랜 지배와 구속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어느새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반응하고 꼬리를 흔들거나 내리게 되었을까. 그러니 너희들은 더더욱 짐승 취급을 당해도 당연하다며 누군가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을 던질 텐데, 라며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언제부터 사회적인 틀 속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찾는다. 그게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정말 한심한 얘기이지만 변화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우리의 치부를 살살 건드리고 있다. 언젠가는 그 치부가 곪아 터져 용솟음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그늘진 구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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