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 이매진 컨텍스트 29
정민우 지음 / 이매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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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방송국은 무주택자를 대상으로 집 지어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주말 황금시간대에 편성했다. 어느새 ‘서바이벌’이라는 예능의 논리마저 우리의 주거 문화를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다. 공짜 집을 얻기 위한 무주택자의 눈물 나는 노력이 우리의 주말을 웃기고 울리게 될까? 어쩌면 그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우리의 일상적 ‘경쟁’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경쟁’은 ‘내 집 마련’이라는 우리의 지상명령에 귀결되는 것이다.

과연 ‘집’이 우리 삶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일까? 대학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던 정민우는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 직접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집과 공간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으로 고시원을 삼은 것은 고시원이 담당하고 있는 독특한 사회적 기능 때문이다. 고시원은 한 평에서 한 평 반 정도하는 최소한의 공간에 공부하고 잠을 자는 곳이다. 고시원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듯, 고시원은 원래 고시생들을 위한 값싼 공부방 기능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득이 적은 대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가 선택하는 하나의 주거공간으로서 존재한다. 2009년 통계치에 따르면 전국의 고시원 수는 6,126개고, 서울에서만 고시원에 거주하는 인구가 10만 8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정도면 주거형태로서 고시원은 일종의 사회현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한 평 최소한의 공간을 자기 집으로 삼는 걸까?

저자가 고시원을 연구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본인이 고시원에 들어가서 직접 살아보는 거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저자는 고시원이라는 좁은 공간에 살면서 느낀 변화를 일기 형태로 고스란히 남겼고, 이후 취재를 통해서 고시원에 살고 있거나 또는 살았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체험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다. 그들은 고시원을 이렇게 회상한다. “친한 사람. 그런 거 없고. 그냥 고독했어요. 진짜. 그냥다…… 개미굴…….” “극한의 시기? 제가 견딜 수 있는 가장…… 가장 마지막 선까지 왔다.” “끝없이 무기력증에 빠져요. 다른 게 불편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 건 없었지만. 그 안에선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고시원 생활의 단점 대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건 주로 좁은 방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물리적 불편함들이다. 그러나 경험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고시원 생활의 단점은 그런 게 아니다. 일종의 사회적 공포라고 할까. 말하자면 좁은 공간에 의해 단절되는 인간성과 사회성,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간다는 자괴감과 같은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의 자아실현을 위한 공간으로서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제목을 붙인 이 책이 말하는 고시원은 청년들이 자아실현과 사회진출을 위해 마련한 현대판 ‘자기만의 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고시원에 산다는 사회적 굴레는 청년들을 병들게 한다. 무주택자의 불행을 일찌감치 경험한 청년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어쩌면 그들은 내 집 마련을 위한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같은 눈물나는 경쟁 속에 사는 건 아닐까?

이 책은 비록 논문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학자의 눈으로 고시원과 고시원에 사는 청년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집 없는 청년들의 자화상이랄까, 심지어 몇몇 부분에서 저자는 청년 세대로서 공공연히 내면의 슬픔과 분노를 드러낸다. 소위 88만원 세대에 대한 책이 넘쳐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단순히 사회학의 소재가 되버린 것은 아니다. 88만원 세대가 직접 쓴 『자기만의 방』과 같은 책들은 연대의 화법으로 자기 세대를 다룬다. 이런 일련의 저작들이 결국 청년세대의 진정한 목소리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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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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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고전 동화를 곧이곧대로 읽는 일이 없다. 고전 동화를 재해석하고, 까발리는 작업은 한때 유행처럼 번졌었고, 동화를 둘러싼 온갖 진실과 거짓은 한동안 우리에게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안겨 주었다. 어릴 적 우리에게 따뜻한 교훈과 권선징악의 쾌감을 주었던 고전 동화가 왜 이런 시련을 겪게 된 것일까? 단순히 고지식하고 허무맹랑한 동화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일까?

따지고 보면 고전 동화는 의혹투성이다. 어린 나이에 처음 고전 동화를 접했을 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어른이 돼서 읽은 동화엔 차마 그냥 넘길 수 없는 온갖 의혹들이 넘친다. 가끔은 너무 시시콜콜해서 지적하는 거 자체가 웃긴 일이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백설공주는 왜 자꾸 (왕비에게) 문을 열어 줄까?’‘왕좌는 왜 구두로 신데렐라를 찾았을까’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사인 박현희는 그런 의문과 의심들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게 곧 세상에 대한 의문과 의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서평작인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는 그 의문과 의심의 기록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히 동화를 조롱하는 데 목적을 두진 않는다. 오히려 등장인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준다고 할까. 동화 속 등장인물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가 있다면 동화를 훈육의 도구로 삼은 사회적 맥락에 있는 것이지.

백설공주는 수동적이고 멍청한 공주 캐릭터의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그녀의 인간적인 고독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낯선 사람에게 자꾸 문을 열어주는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볏짚으로 집을 지었던 아기 돼지 삼형제의 첫째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한다. ‘견고함’이 집의 유일한 덕목은 아니다. 볏짚이나 풀로 엮은 집도 충분히 실용적이고 아름답다. 우리는 오늘날 그런 집을 환경친화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부지런한 노동자와 가난한 예술가에 대한 은유인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도 있다. 동화 뒤집기의 일환으로 개미와 배짱이의 삶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다소 유보적이게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개미의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개미의 근면이 소유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 미래지향적이고 본인안위만을 챙기는 태도에서 기인한다면, 여전히 그걸 모범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쉽게 간과해 버리지만, 다른 문학과 마찬가지로 동화도 사회를 보는 창이다. 우리는 어른인양 동화의 순진함을 비웃기도 하지만, 오히려 동화는 그 순진하고 뻔뻔한 주제의식으로 도덕적 헤게모니를 차지한다. 이 책은 동화에 대해 계속 의문부호를 날리지만, 오히려 그건 사회에 던지는 의문에 가깝다. 동화 뒤에 숨은 사회의 진면목을 까발리는 것이, 어쩌면 저자의 숨은 의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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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종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영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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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不死)에 대한 문학적 언급은 대체로 비극적이다. 특히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영원히 죽지 않지만 육체는 쇠약해지는 불완전한 불사가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타락시키는지 잘 보여 주었다. 걸리버는 처음 불사의 능력에 대해서 알았을 때, 이것이 분명 인간의 문명을 이롭게 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문명은 시간의 건전한 흐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든가, 빨리 감는다든가, 아니면 흐름 자체를 거부한다고 했을 때, 그 문명이 과연 건전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미국의 흑인 여성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에 불사인 남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불사 방식은 서로 다르다. 4천 년을 살아온 남자 도로(동쪽)는 자신의 정신을 타인의 몸에 옮겨가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산다. 300살의 여자 안얀우(태양)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완벽한 조종 능력을 바탕으로 영원히 늙지 않게 된다. 즉, 도로는 남을 살해함으로써, 안얀우는 자신의 몸을 살림으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를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비유로 읽어도 좋다. 결국 불사에 대한 이 성적인 차이가 이야기를 이끌어 갈테니까.

아프리카 밀림에서 안얀우를 만난 도로는 그녀를 설득해서 아메리카에 있는 자신의 공동체로 데리고 간다. 현명한 치유자이면서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안얀우였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도로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죽는 걸 수 없이 지켜봐야 했던 안얀우는 도로의 존재가 영원한 안식처임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4천 년을 살아온 도로는 300살의 안얀우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도로는 아주 미약하지만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모아 작은 공동체를 만들곤, 계획적인 교배를 통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도로는 안얀우를 이 공동체의 교배종이자 보육자, 치유자로서 데리고 온 것이다.

안얀우는 처음에 이 비윤리적이고 가부장적인 상황을 거부하지만, 자신과 자기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으로 도로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그렇게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로와 안얀우는 복종과 저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공동체에서의 삶을 이어가게 되는데...

옥타비아 버틀러의 ‘도안자(patternist)’ 시리즈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다양한 모습으로 읽힌다. 공동체의 절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를 의미하는 도로와, 자유와 저항,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하는 안얀우의 대립은 흡사 페미니즘 소설의 성격을 보인다. 그러면서 문명 대 문명의 충돌이 야기한 노예 이민의 역사를 돌연변이 공동체의 역사로 대체한 유사 유토피아 소설이기도 하다. 불사와 치유, 독심술 능력의 이면에 대한 장르적 상상력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다.


어쩌면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도로와 안얀우의 대립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진 말자.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 남녀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조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이 장대한 러브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는 남녀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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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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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 문학의 최고 극단이다.’

제35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철수 사용 설명서』를 선정하면서 소설가 박성원은 심사평으로 그렇게 적었다. 여기서 루저(패배자) 문학이란 문학의 엄격한 분류 체계에 속하지는 않는다. 다만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사회에 도태된 패배자가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여 주류 사회를 조롱하거나, 또는 철저하게 패배하는 작품들을 우리는 ‘루저 문학’이라고 불렀다. 당장에 박민규, 김애란, 백가흠 등의 이름이 떠오르는데, 이제 그 목록에 전석순이라는 20대 작가 이름을 추가한다고 해서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루저야 말로 20대의 진정한 세대적인 특질임을 우리는 이미 (반성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나, 당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도 있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이 시대의 평범한 20대 청년 백수에 대한 사용설명서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키 175cm, 몸무게 65kg, 지방 국립대 출신의 평범한 청년 철수를 가전제품에 비유하며, 어떻게 하면 사용자가 철수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철수는 사용 방식에 따라 취업 모드, 학습 모드, 연애 모드, 가족 모드를 지원하고, 각 모드에 따른 잘못된 사용 방식을 나열하고, 각별한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아빠를 ‘돈 벌어오는 기계’나 엄마를 ‘집안 일하는 기계’쯤으로 비유하는 표현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철수 사용 설명서』는 그런 비유적 표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한 권의 사용 설명서를 자처하고, 철수를 철저하게 가전제품으로 치부한다.
‘회사를 선택하기 전에 반드시 입사 가능한 회사인지 아닌지 확인해 주십시오. 철수의 역량 범위 내에 있는 회사 목록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와 같은 사용 시 주의 사항도, ‘품질보증 기간도 지났는데 반품할 수도 없고 교환할 수도 없고 답답했죠. 그나마 큰돈 들어가는 고장이라도 없으니 다행이었어요.’라는 사용 후기도, ‘철수를 결혼 모드로도 쓸 수 있나요?’ 라는 상품 Q&A도 철수를 원래부터 필요에 따라 구매하고, 필요에 맞지 않으면 반품하는 가전제품쯤으로 치부한다. 20대의 자기비하는 스스로를 가전제품에 비유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그렇지만 이 소설은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찾고 싶은 구직 청년을 가전제품에 비유하는 세태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사용 설명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용하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함부로 ‘고장 났다’고 말하는 태도에 있다.
‘고장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단지 제품의 고유한 특징을 모르고 잘못 사용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훌륭한 제품이라도 사용 설명서가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제품일 뿐이다.’

이제까지 루저 문학은 현실을 냉소하거나 도피함으로써 루저를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분리했다면, 『철수 사용 설명서』는 개인이 기계화되는 현실을 자조하지만, 그렇다고 그 현실에 비켜서지 않는다. 사용 설명서는 오히려 ‘고장난 제품’들 간의 유일한 소통 도구가 된다.
‘정확한 사용 설명서는 사용되는 제품에게도,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상처를 주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기 세대를 가전제품에 비유하는 데 있어서 다소 자조적이지만, 그럼에도 자기 세대에 대한 핍진한 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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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홈스쿨
고경태.고준석.고은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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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머리글에서 이미 강조했듯, 글쓰기 책은 널렸다. 시중에 1,000권이 넘는 글쓰기 책에서 ‘의미 있는 플러스 원’이 되고 싶다는 저자의 작은 소망은 실현 가능할까? 적어도 소재만큼은 ‘의미 있는 플러스 원’이지 싶다. 대관절 ‘글쓰기 홈스쿨’이라니! 기자인 아빠가 아들, 딸에게 손수 글쓰기를 가르쳤다. 아이들은 쓰고, 쓰고, 또 썼고, 아빠는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쳤다. 그 과정을 한겨레 지면과 yes24에 연재했는데, 지인들은 글쓰기 아동학대라고 수근거렸을 정도라니 그냥 글쓰기 지도가 아닌 홈스쿨이란 말을 붙인 것도 과장은 아닌 듯싶다.

현직 기자인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글쓰기 책을 썼다는 것은, 첫째 그만큼 아이들 눈높이에 맞췄다는 의미고, 둘째 기자답게 철저하다는 의미다. 각각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4학년인 준석과 은서는 아빠가 건넨 주제로 매주 글을 써내야 했다. 기자의 아들, 딸이라고 해서 작문실력이 또래와 크게 다를 리 없다. 비문과 오타는 애교요, 개념 상실은 기본이다. 그럴 때 다 현직 기자인 아빠는 ‘빠꾸’ 시켰고, 아이들은 억지춘향 다시 써냈다. 그런 과정에서 아이들 글은 ‘꼴’을 차츰 갖췄다.

사실 글쓰기 책으로서 ‘띄어쓰기를 잘하자’, ‘접속사를 줄이자’, ‘부사를 다양하게 쓰자’, ‘능동태를 쓰자’는 조언은 좀 식상하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글을 통해 그런 오류를 확인하고, 아빠의 조언에 따라 글이 개선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독자로서 색다른 경험이다. 학생에게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좋은 지침서가 될 거고,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학생이라면 좋은 자습서가 될 거다. 아이들 글도 글이지만, 글을 잘 쓰기 위한 저자의 아낌없는 조언도 좋다. 서평 끝에 밝히지만, 글쓰기로 아동학대한 이 아빠는 한겨레에서 20년간 글을 쓴 고경태 기자다. 이런 학대라면 나서서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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