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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종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영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불사(不死)에 대한 문학적 언급은 대체로 비극적이다. 특히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영원히 죽지 않지만 육체는 쇠약해지는 불완전한 불사가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타락시키는지 잘 보여 주었다. 걸리버는 처음 불사의 능력에 대해서 알았을 때, 이것이 분명 인간의 문명을 이롭게 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문명은 시간의 건전한 흐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든가, 빨리 감는다든가, 아니면 흐름 자체를 거부한다고 했을 때, 그 문명이 과연 건전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미국의 흑인 여성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에 불사인 남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불사 방식은 서로 다르다. 4천 년을 살아온 남자 도로(동쪽)는 자신의 정신을 타인의 몸에 옮겨가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산다. 300살의 여자 안얀우(태양)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완벽한 조종 능력을 바탕으로 영원히 늙지 않게 된다. 즉, 도로는 남을 살해함으로써, 안얀우는 자신의 몸을 살림으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를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비유로 읽어도 좋다. 결국 불사에 대한 이 성적인 차이가 이야기를 이끌어 갈테니까.
아프리카 밀림에서 안얀우를 만난 도로는 그녀를 설득해서 아메리카에 있는 자신의 공동체로 데리고 간다. 현명한 치유자이면서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안얀우였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도로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죽는 걸 수 없이 지켜봐야 했던 안얀우는 도로의 존재가 영원한 안식처임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4천 년을 살아온 도로는 300살의 안얀우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도로는 아주 미약하지만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모아 작은 공동체를 만들곤, 계획적인 교배를 통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도로는 안얀우를 이 공동체의 교배종이자 보육자, 치유자로서 데리고 온 것이다.
안얀우는 처음에 이 비윤리적이고 가부장적인 상황을 거부하지만, 자신과 자기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으로 도로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그렇게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로와 안얀우는 복종과 저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공동체에서의 삶을 이어가게 되는데...
옥타비아 버틀러의 ‘도안자(patternist)’ 시리즈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다양한 모습으로 읽힌다. 공동체의 절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를 의미하는 도로와, 자유와 저항,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하는 안얀우의 대립은 흡사 페미니즘 소설의 성격을 보인다. 그러면서 문명 대 문명의 충돌이 야기한 노예 이민의 역사를 돌연변이 공동체의 역사로 대체한 유사 유토피아 소설이기도 하다. 불사와 치유, 독심술 능력의 이면에 대한 장르적 상상력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다.
어쩌면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도로와 안얀우의 대립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진 말자.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 남녀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조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이 장대한 러브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는 남녀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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