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루저 문학의 최고 극단이다.’

제35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철수 사용 설명서』를 선정하면서 소설가 박성원은 심사평으로 그렇게 적었다. 여기서 루저(패배자) 문학이란 문학의 엄격한 분류 체계에 속하지는 않는다. 다만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사회에 도태된 패배자가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여 주류 사회를 조롱하거나, 또는 철저하게 패배하는 작품들을 우리는 ‘루저 문학’이라고 불렀다. 당장에 박민규, 김애란, 백가흠 등의 이름이 떠오르는데, 이제 그 목록에 전석순이라는 20대 작가 이름을 추가한다고 해서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루저야 말로 20대의 진정한 세대적인 특질임을 우리는 이미 (반성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나, 당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도 있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이 시대의 평범한 20대 청년 백수에 대한 사용설명서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키 175cm, 몸무게 65kg, 지방 국립대 출신의 평범한 청년 철수를 가전제품에 비유하며, 어떻게 하면 사용자가 철수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철수는 사용 방식에 따라 취업 모드, 학습 모드, 연애 모드, 가족 모드를 지원하고, 각 모드에 따른 잘못된 사용 방식을 나열하고, 각별한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아빠를 ‘돈 벌어오는 기계’나 엄마를 ‘집안 일하는 기계’쯤으로 비유하는 표현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철수 사용 설명서』는 그런 비유적 표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한 권의 사용 설명서를 자처하고, 철수를 철저하게 가전제품으로 치부한다.
‘회사를 선택하기 전에 반드시 입사 가능한 회사인지 아닌지 확인해 주십시오. 철수의 역량 범위 내에 있는 회사 목록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와 같은 사용 시 주의 사항도, ‘품질보증 기간도 지났는데 반품할 수도 없고 교환할 수도 없고 답답했죠. 그나마 큰돈 들어가는 고장이라도 없으니 다행이었어요.’라는 사용 후기도, ‘철수를 결혼 모드로도 쓸 수 있나요?’ 라는 상품 Q&A도 철수를 원래부터 필요에 따라 구매하고, 필요에 맞지 않으면 반품하는 가전제품쯤으로 치부한다. 20대의 자기비하는 스스로를 가전제품에 비유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그렇지만 이 소설은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찾고 싶은 구직 청년을 가전제품에 비유하는 세태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사용 설명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용하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함부로 ‘고장 났다’고 말하는 태도에 있다.
‘고장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단지 제품의 고유한 특징을 모르고 잘못 사용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훌륭한 제품이라도 사용 설명서가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제품일 뿐이다.’

이제까지 루저 문학은 현실을 냉소하거나 도피함으로써 루저를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분리했다면, 『철수 사용 설명서』는 개인이 기계화되는 현실을 자조하지만, 그렇다고 그 현실에 비켜서지 않는다. 사용 설명서는 오히려 ‘고장난 제품’들 간의 유일한 소통 도구가 된다.
‘정확한 사용 설명서는 사용되는 제품에게도,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상처를 주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기 세대를 가전제품에 비유하는 데 있어서 다소 자조적이지만, 그럼에도 자기 세대에 대한 핍진한 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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