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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ㅣ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평점 :
3월 13일 금요일
나는 일기 쓰는 걸 관둔지 20년도 훨씬 지난 사람이라, 날짜를 적는 걸로 글을 시작하려니 퍽 어색하다. 그러나 마리오 베네데띠의 『휴전』을 소개하는 이 글 만큼은 이렇게 시작하리라 진작 마음먹은 터였다. 비단 내가 일기 형식의 이 소설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을 읽으며 어느새 나는 글 앞에 특정한 시간을 못 박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글은 일기는 아닐지라도, 내 일대기(그런 게 있다면)에 지금 이 ‘시간’이 하나의 ‘기록’으로 남을 터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휴전』을 읽고 3월 13일에 이 글을 씀’ (그러고 보니 이게 바로 일기(日記)인 것 아닐까?)
소설 『휴전』은 이제 퇴직을 6개월여 앞둔 중년 남성, 마르띤 산또메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 전체가 마르띤 산또메가 쓴 일기로 이루어 졌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인데, 그렇다면 소설의 형식으로써 일기라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게 그냥 1인칭 시점의 변주 정도는 아닌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나는 이러한 형식이 소설의 서사 뿐 아니라 독자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독자는 마르띤 산또메라는 이름의 남자가 쓴 일기로 소설의 서사를 접하게 되는데, 이 서사라는 것은 결국 마르띤 산또메가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며 그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타인의 일기는 그냥, 몰래, 훔쳐보듯 읽는 것이지, 진지한 비평의 대상은 못 된다. 그러니 이 소설, 『휴전』을 읽다 보면, 진지한 독자로서의 태도는 일부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판단하고, 기대하고, 예측하기보다, 그저 무언가 일어나길 기다리게 된다. 나는 이것이 독특한 독서 경험이라 생각하는데, 게다가 이것은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도 거의 근사한 것이다.
마르띤 산또메는 법정 퇴직연령에 따라 퇴직을 반년 앞둔 남자이다. 또 오래전에 상처하여 홀로 세 남매를 키운 홀아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젊어서부터 어지간히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인물로, 이제는 삶에 애착이나 미련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설의 전반부는 삶에 대한 권태와 무감각으로 무겁게 침잠해 있다. 만약 이 소설이 그의 젊었던 한 때, 즉 아내를 잃기 전과 후를 다루었다면, 『휴전』은 인생의 부조리에 관한 아주 뜨거운 이야기가 되었을 법도 하다. 그랬다면 소설의 제목도 ‘휴전’이 아닌,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휴전』은 마르띤 산또메가 세파에 정신적·육체적으로 완전히 고갈되길 기다린 다음,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2월 11일 월요일
이제 퇴직까지 6개월 28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 지 어느덧 5년이 넘었다. (…)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권태와 무료함으로 가득하리라는 것은 지당한 예측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 전반부는 그렇게 진행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소설의 분위기는 독자가 전혀 기대 못한 방식으로 반전된다. 우리의 마르띤 산또메 역시 자신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지는 예상하지 못 했다.
5월 2일 목요일
(…) 그전에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이 나이에 갑자기 나타난 딱히 예쁘지도 않은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내가 사춘기 소년처럼 안절부절못한다는 것이다. (…)
이 시점에서 소설은, 다소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아주 극적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기까지 마르띤 산또메가 감정을 새로이 쌓아가는 모습을, 그가 쓴 글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 소설이 일기 형식인 것이 특징이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이라 말해볼 수도 있다. 일기란 매일의 기록이 쌓여서 커다란 일대기를 만들어 내는 글타래이다. 이 일대기의 결말이 어떤 모습일지, 일기 초반이나 중반에는 결코 알 수 없다. 하루라는 시간 단위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형식의 소설은 특별히 시간의 흐름에 강박적으로 매달리지 않는 이상, 소설의 초반과 결말이 쉽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서술자는 넌지시 결말을 암시하기 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마르띤 산또메는 어떤가? 그저 퇴직을 간절히 기다려온 이 남자가 또 다른 사랑과, 행복과, 절망을 과연 꿈꿔보기나 했을까? 또 다시 운명에 휘말릴 걸 알았을까? 그는 몰랐다. 만약 알았으면 그는 결코……. 소설을 다 읽고 덮은 지금에서 나는, 『휴전』이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인생과도 무척 닮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마르띤 산또메에게 동지애마저 느끼는 것이다.
인생이 전쟁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흔한 비유라고 생각되지만, 또 그만큼 적절한 비유도 없다. 마르띤 산또메는 이 전쟁을 꽤 오랫동안 치룬 사람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잠시 허락된 ‘휴전’일 뿐이었다. 퇴직으로도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그는 계속 불행과 싸울 것이고, 나는 또 나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