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간 아래 사람
난간에 서서 아래를 볼 때
당신은 난간 아래에서 운다.
거리엔 피 없는 자들이 활보하고
아아, 이럴 수는 없지!
당신은 연옥에서 깃발로 펄럭인다
펄럭이는 것들은 울음,
손톱은 비통(悲痛)에서 돋은 신체다.
당신이 난간을 붙든 채 서 있고
나는 난간 아래 사람,
나는 머리칼을 짧게 자르고
당신은 나를 모른다.
우울은 슬픔의 저지대(底地帶)다.
푸른 벽에 못 박힌 달!
꿈길 밖에 길이 없어 바다 속으로
침수한다면,
물속에서 누가 울고 있습니까?
당신도 무섭습니까? (P.16 )
노래가 스미지 못하는 속눈썹*
선량한 사람들의 소규모 살림살이,
목청 좋은 시냇물과 종달새의 소리 없는 노래,
한 줄로 오는 저녁을 바라보는
벙어리들,
꽃 지는 밤에 꽃 지는 걸 보는
모자(母子)의 미약한 슬픔,
쥐려고 해도 쥐어지지 않는
한 줄 수평선,
이건 노래,
노래라도 지천인 노래는 아니고
뻘에 묻힌 천년 침향 같이
깊고 슬픈 노래,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
속눈썹 파르르 떨며 맞는 노래! (P.61 )
* 파울 첼란의 시구에서 제목을 따왔다.
광인들의 배*
궁륭(穹㝫)을 떠 가는 배,
광인들이 탑승한 배 위에 우리는
서 있다, 이 혼돈의 바다
한 가운데, 그 새벽 거리에
쓰레기 수거차와 취객들, 비둘기떼와 함께,
우리가 견딘 것은 한 줌의 편두통,
공무원들의 직무유기와 인공 조미료와 진부한 악들,
여자의 거짓말과 얇은 우울들,
제 꼬리를 물고 미쳐 버린 개들,
뼈를 갖고 시를 쓰는 당신,
지금은 담배를 길바닥에 버리는 사람,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기댄
우리를 빚은 건 달빛과 물,
어깨와 어깨 사이로 모래바람이 불어 가지.
먼지거나 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강건한 호랑가시나무는 멀리 있고
우리가 먼 곳에서 돌아올 때
찬 물결 일렁이고 동이 터오지.
자주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닿는 차가운 총구(銃口),
더러운 양말을 뭉쳐 입을 막아!
비명이 새 나오지 않게!
오후에는 동물원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볼까?
양귀비를 사들고 요가를 하는 애인에게 가서
멜론을 먹으며 생일을 축하할까?
긴 휴가를 받아 북해(北海)로 떠날까?
계단들은 새 계단을 낳고
오늘 죽은 자들은 어제의 한숨을 쉬지.
지금은 수탉이 우는 시간,
서리 밟는 호랑이와 경쟁하는 물들,
여기는 진창이야.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여기가 막장이야.
진흙, 진흙, 진흙!
당신은 손에 도살자의 피를 묻히지 않았잖아.
진창에 뿌리를 내려 꽃피는 식물도 있어.
우리는 연꽃이 아니잖아?
연꽃이 아니면 호랑가시나무로 살아야지!
저 착한 나무짐승!
호랑가시나무는 칼바람에 살갗이 터져
온몸에 가시 꽃을 두른 채
진흙 햇빛 진흙 강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한 줌 햇빛을 탁발하겠지.
어둠 속에서 떠가는 배 한 척.
배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배의 갑판에서 웃고 있는 한 사람.
저 웃고 있는 자는
광인인가, 혹은 착한 이웃인가?
노숙자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
문 안에서 먹고 자는 이들은
노숙자들이 얼마나 저유로운지 모르겠지.
우리를 퇴화시킨 건 무지와 신념이야.
지옥에서 헤매게 놔둬.
제 신앙심 부족을 가슴 치며 후회하도록 놔둬.
사랑의 그림자를 견디고
우리는 구백구십팔 번 째의 실패에도 꿋꿋하지.
진흙에 뿌리를 묻었다 해도
호랑가시나무와 함께
눈은 성간(星間) 우주의 숨은 별들을 보자.
구백구십팔 번의 실패와 천 번의 실패 사이에
우리는 서 있지,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
무릎 끓는 건 마른 갈대의 일.
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
솟구쳐 일어섬만이 우리의 일인 것을!
가장 먼 곳을 스쳐가는
광인들의 배여,
안드로메다 대은하 M31 은 여기서 얼마나 먼가.
별자리와 함께 움직이자.
아직 우리는 무엇인가.
아직 우리는 무엇이 아닌가. (P.33 )
* 이 시의 제목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제목 [광인들의 배 The Ship of Fools]
(1490-1500, 루브르 박물관 소장)에서 빌려온 것이다.
-장석주 詩集, <일요일과 나쁜 날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