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꽃이 피면 꽃이 핀다가 아니라 눈이 내린다고 말하는 마

      을이 있다

 

 

      꽃이 지면 꽃이 진다가 아니라 눈이 그친다고 말하는 마

      을이 있다

 

 

      그 마을의 오래된 아낙들은 꽃이 필 즈음, 아니 눈이 내

      릴 즈음

 

 

      장독대 숫눈을 닦고

 

 

      겨우내 닫아놓았던 독을 열어 하늘과 제 얼굴을 비춰 보

      면서

 

 

      하얀 웃소금을 그 위에 한 번 더 쳤다  (P.67 )

 

 

 

 

 

 

 

         꽃나무를 나설 때

 

 

 

 

 

 

       산길에 혼자 피어 있던 개살구꽃이 그새 지고 있다

 

 

       갓 나온 잎새가

       꽃의 얼굴을 대신해 나를 맞는다

 

 

       계시냐?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해

       돌아서야 했던 저녁과

       찾아왔으나

       만나지 못하고 끝내 돌아가야 했던

       저녁

 

 

       우린 모두

       아주 깨끗하고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지

 

 

       꽃이 가고 없어 대신

       어린 잎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P.73

 

 

 

 

 

 

          얼음옷

 

 

 

 

 

        미처 거두지 못한 배추들이

        추레한 행색으로 겨울밭 한가운데 앉아 있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는지

        누렇게 해진 옷 속으로 또 몇 겹의

        낡은 옷이 얼비친다

        한 겹, 두 겹, 세 겹, 네 겹....

        몸은 얼어 있고

        옷은 종이장처럼 얇아져 있다

        삼동(三冬)을 나기 위해 배추는 지난 가을부터

        푸른 잎사귀의 옷을 껴입었다

        머리띠를 둘렀다

        남의 옷을 벗겨가는 종자(種子)는

        인간뿐이다

        배추 속 한가운데 어린 배추가

        목숨처럼

        웅크리고 있다  (P.111 )

 

 

 

 

         -고영민 詩集, <구구>-에서

 

 

 

 

 

 

 

            오리부부나무

 

 

 

 

 

 

           아주 옛날, 오리 부부가 살았습니다

           남편 오리는 언제나 붕어와 풀씨를 물어다줬습니다

           비바람이 치면 보자기처럼 날개죽지를 펼쳐 품어줬습니다

           몇 년이 지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세월

           점점 몸이 말라가다가 남편 오리도 끝내 숨을 거뒀지만

           자신이 죽은 것조차 모르는 남편 오리는 또

           아내 오리를 위해 붕어와 풀씨를 물어다줬습니다

           들고양이나 족제비가 나타나면은 목숨을 걸고 지켜줬습니다

           저수지처럼 마를 줄 모르는 사랑, 넘쳐서 하늘에 닿았는지

           밤마다 별들이 소리없이 눈물을 쏟다 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세월

           그 자리엔 한 쌍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오리부부나무라 불렀습니다

           비바람이 치면 날개죽지로 품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를 밀며 오리 궁둥이같이 기우뚱기우뚱

           하늘을 향해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P.11 )

 

 

 

 

 

 

             구름 위의 식사

 

 

 

 

 

             두고 온 건 집만이 아니었다

             구름 위 돗자리를 펴고 앉어

             한 잔의 수유차와 난 몇 조각으로도 배가 부른 사람들,

             까를 산정(山頂) 가득 흘러내리는 저 웃음소리들

 

 

             너무 오래 되어 좀이 슨 미움은

             지나는 바람의 서랍 속에 쳐넣으면 되었다

             가슴까지 피었다가 만 한 송이 꽃 같은 그깢, 미련 쯤

             뚝 꺽어 집 앞 강가에 흘려보내면 되었다

 

 

             마음의 빨랫줄에

             옷 한 벌 걸려 있어도 오를 수 없는 곳

             깃털이 되어야 비로소 오를 수 있는 곳

 

 

             해피 벨리*

 

 

             끝내 새 울음소리 산마루를 다 넘어갈 때까지

             기다려주질 못하고 서둘러 내려가는 내 발자국 뒤로

 

 

             걸망처럼 지고 가는 건 웃음소리밖에 없는 사람들이

             구름 위에서 더 높은 구름 위로

             둥둥 떠오르고 있다  (P.69 )

 

 

 

                  *해피 벨리: 인도 북부 무수리 고원 지대에 위치한 티베트인 마을

 

 

 

 

              -함명춘 詩集, <무명시인>-에서

 

 

 

 

 

 

 

 

 

 

 

 

 

 

 

 

시인의 말

 

 

작가 최인호가 말했다.

"명춘아, 너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 줄 아니?"

 

내가 말했다.

"음, 사랑이요 아니 믿음이요."

 

작가 최인호가 말했다.

"아니다 죽는 거다."

 

우린 말없이 걸었다.

 

 

2015년 11월

함명춘

 

 

 

 

 

      오늘도 부질없이 속이 훤히 보이는 '억지춘향' 같은 말들이 공중을 뛰어 다니는

      모습들을 보았다.

      어제 오늘 내리던 비가 그치고, 지금은 수더분하고 수수한 밤이 왔다.

      그래서 나도 정직하고 맑은 말들의 이야기를 듣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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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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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2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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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0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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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07: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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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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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15: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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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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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16: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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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11-15 16:35   좋아요 0 | URL
아침도 저녁도 지나고 밤이 오면
모든 앙금도 다툼도 부디 그치고
사이좋게... 아니 저마다 곱게
잠들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appletreeje 2015-11-15 18:26   좋아요 1 | URL
예~ 숲노래님께서도 곱고 편안한 밤 되세요.^^

2015-11-16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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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6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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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7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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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7 1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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