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는 것

 

 

 

 

 

     그냥 지나간다고 잊히는 것은 없다.

 

     가을이 지나간 들판 황금 낱알 몇 알 숨어 숨쉬고

     무서리 지나간 고샅길 남새밭에 푸른 문장들 남았다

 

     젊은 시절 잠시 스쳐 개여울처럼 흘러간 사람

     내 피에 깊이 새긴 물무늬 여전히 붉고 뜨겁다.  (P.25 )

 

 

 

 

 

 

 

       수세미꽃이 있는 풍경

 

 

 

 

 

      쇠숟가락으로 온기 먼저 담겨 오는 민물새우뭇국 받아

      들고

      남루한 가족 모여 따뜻하게 먹는 저녁이 있었다

 

      여흘여흘 흘러가던 저녁강 깊어지며 비로소 잠드는데

 

      기다릴 사람 돌아올 사람 없지만

      바람길 따라 에두른 돌담 위로 노란 등불 맑게 켜지는 밤

      이 있었다.  (P.11 )

 

 

 

 

 

 

        꽃밥

 

 

 

 

 

       양산 상북면 신전리 천연기념물 이팝나무 꽃가지가 그

       득그득 피우시는 이유는

 

       내가 올해 꽃 피웠으니 자네 부부 한 번 다녀가시라는 것.

       와서 꽃밥 배부르게 자시고 가시라는 것

 

       노거수 꽃피워 청하는 오래된, 아름다운 약속.  (P.16 )

 

 

 

 

       -정일근 詩集, <소금 성자>-에서

 

 

 

 

 

 

 

 

 

술 먹고 돌아온 男,이 가방에서 부시럭 쑥스럽게 꺼내준

망개떡 먹다 쫄깃함에 목이 메어, 시인의 '물의 뺨을 쳤다'

처럼 산사의 돌확에 고인 맑은 물 한바가지, 공손히 떠 마시고 싶다.

 

 

물의 뺨을 쳤다

 

 

산사서 자다 일어나 물 한 잔 떠먹었다

 

산에서 흘러 돌확에 고이는 맑은 물이었다

 

물 마시고 무심코 물바가지 툭, 던졌는데

 

찰싹, 물의 뺨치는 소리 요란하게 울렸다

 

돌확에 함께 고인 밤하늘의 정법과

 

수많은 별이 제자리를 지키던 율이 사라졌다

 

죄였다, 큰 죄였다

 

법당에서 백여덟 번 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물의 뺨은 퉁퉁 부어 식지 않았다. (P.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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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0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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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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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9-20 06:40   좋아요 0 | URL
망개떡도 맑은 물도
따스한 손길이 어리는
고운 노래와 같네요

appletreeje 2015-09-20 10:09   좋아요 1 | URL
망개떡의 유래를 읽어보니, 민가에서는 어린 잎은 나물로 먹기도 하고
큰잎은 떡을 싸면 오랫동안 쉬지 않고 향기가 배어 나온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5월 단오때부터 한 겨울내 만들어 먹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더군요 ^^
망개나무 잎으로 싼 쫀득하고 달달한 망개떡과 시의 마음으로 뜻밖의 즐거움을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

2015-09-20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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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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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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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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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0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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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07: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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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1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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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19: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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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2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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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2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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