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 이젤
물감은 소리를 머금고 감춘다
빛을 통과시키고 빛나듯
붓을 드는 순간 꽃은 떤다
물감에 배인 꽃의 입술
벗은 어깨가 흘러가는 곳으로
한사코 따라나서보지만
따라갈 수 없는 너머를 가리고 있는 붓은
문이거나 장막이다
성(城)의 운명은 무너지는 것
감열지처럼 지나간 흑백으로 남은
꽃이 제몸으로 예언한
물감에 점령되는 날이 온다
성벽을 성벽으로 감춘 그림
손수건처럼 잡아당기자
에펠탑을 이젤로 쓴
몽마르트 언덕이 어깨를 드러낸다
빛이 굳어 이젤이 된
사크레 쾨르 성당이 마리아처럼 서 있다 (P.88 )
발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
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꽃에게 가고 있다
뱀은 몸이 날개고
식물은 씨앗이 발이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
지상을 여행하는 걸음걸이는 같다
걸어다니든 기어다니든
생의 몸짓은 질기다
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한 걸음 씩만 내딛는 길에서
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을 길이게 하는 발
새는 허공을 밟고
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뿐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
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P.60 )
-권기만 詩集, <발 달린 벌>-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
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
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들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
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
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
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
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P.48 )
연애 간(間)
점과 점이
마음
내어
선을 이루지만,
참새라도 앉으면
여리게 떨
리는,
저 전깃줄. (P.144 )
-이하석 詩集, <연애 間>-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