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계를 상상해 보자. 내가 책장을 넘기지 않고 대신 넘겨주는 기계. 이 기계를 쓰면 책장을 넘기는 수고를 덜 수 있지만, 내가 책을 빨리 읽고 싶다고 해도 결코 마음대로 책장을 넘길 수 없다. 내가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며 읽을 수 있도록 기계가 책장을 넘겨준다면, 우리는 타인의 글을 더 정성 들여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미국 드라마 <화이트 칼라>를 보다가 실제로 이런 기계가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수백 년전의 고서를소중하게 보관하기 위해 특수 유리창에 책을 펼친 채 넣어두고 무려 두 시간마다 딱 한 장만 읽을 수 있도록 책장이 천천히 넘어가게 만든 기계장치였다. 입맛 따라 골라 읽을 수 없으며, 무조건 우직하게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꼼꼼하게 다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속도를 정할 수 없고 아주 천천히 그 책이 보여주는대로 읽어야 하는 철저히 타율적인 독서. 순간 나는 그 독서 기계가 살짝 탐이 났다. 가끔 나는 책을 너무 빨리 읽게 될까봐 겁이 나기 때문이다. 인터넷 정보들을 마우스의 스크롤 기능을 이용해 빨리빨리 넘겨보는 나 자신이 무서울 때도 있다. 소셜미디어가 급증하면서 누구나 1인 미디어 하나쯤은 갖고 있지만, 글을 많이 쓰는 대신에 한 편 한 편의 글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느려터진 독서 기계를 바라보며 점점 속독과 발췌독에 길들어가는 나의 메뚜기식 독서에 제동을 걸고 싶어졌다. 전부 이해했다 믿고, 다 안다고 믿으며 빨리빨리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듯 한 글자 한 글자 새겨가며 읽는 그런 독서가 그립다. 그렇게 천천히 타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마침내 글을 쓰는 행위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타인이 그토록 어렵게 쓴 글을 너무 쉽게 읽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천천히 읽어가며 가슴에 새기는 일은 내가 직접 글을 쓰는 행위만큼이나 힘겹지만 뿌듯한 그 무엇이 되
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의 글을 그렇게 천천히 읽어준다면, 서로의 언어를 그렇게 소중히 다뤄준다면 이토록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찢는 오해와 갈등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P.270~271)
어렵게 쓰고, 어렵게 읽었다
소셜미디어가 급증함으로써 대중의 글쓰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글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고 글의 본뜻을 깊이 있게 우려 내어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글쓰기와 글 읽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우리는 글을 어렵게 쓰고 어렵게 읽었다. 그만큼 글쓰기를 소중하게 여기고 글 속에 사람의 혼魂이 담겨 있다 여겼던 시대였다. 인터넷이 확산되자 사람들은 좀 더 많은 글을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렵게 쓴 글을 쉽게 읽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대조차 지나, 쉽게 쓰고 더 쉽게 읽는 시대가 와버렸다. 글쓰기도 쉽고, 아니 쉬운 것처럼 보이고, 글 읽기는 더더욱 쉬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빠른 리액션과 경쾌한 글쓰기만이 지닌 장점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고 진중하게 세상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영역이 줄어든다는 점이 문제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오래 글을 쓰는 사람, 글 한 줄을 쓰는 데도 며칠 밤을 새워야 하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평가절하되는 것이 문제다. 그리하여 나는 더더욱 진
지한 글쓰기, 심각한 글쓰기를 응원하고 싶다. 한 줄을 쓰더라도 한 문단을 쓰더라도 마음에 남는 글쓰기, 억지로 읽으라고 권하지 않아도 한참 보고 곱씹고 또 되뇌고 싶은 글을 읽고 싶다.
그리하여 요새 유행하는 대중적 글쓰기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장삿속이 아닌, '누구나, 글을 쓴다면 제대로 써야 한다'는 책임감의 문제를 제기한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고, 누구나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글을 쓴다면 그 글의 무게만큼 엄연히 세상살이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글의 무게만큼 삶의 무게도 등에 져야 함을 깨달을 때, 그저 직업이나 이벤트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삶의 글쓰기가 시작된다. (P.272~273 )
/ 내 안에 꿈틀거리는 은밀한 외침.
-정여울, [그림자 여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