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트리
레몬나무를 심고 싶었어
크리스마스에 달린 금종처럼 노랗게 익은 레몬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 상상만으로 즐겁지 않나 가끔 선머
슴 같은 바람이 지나가면 노오란 신향기가 어린별의 숨결
처럼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참, 울음을 터뜨리는 창문 같은
곳으로 멀리 퍼져나가는
그래서 마음밭 두 평쯤을 갈아엎었지 하지만 결심은 자
꾸 미뤄지는 법 어디서 묘목을 구해야 하나 궁리하다 두
어 해쯤이 지났어 지금도 어디서 묘목을 사야 하는지 누
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도무지 난감한 날,
다시 레몬트리 상상을 하는 거야
그 신향기가 퍼져 나가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윙크를 하는 상상, 노란 웃음이 너
울처럼 퍼져 가겠지
상상도 즐겁게 키가 크는 법
별빛도 찾지 않는 밤, 각을 세운 바람이 낡은 문풍지를
사납게 두드리는 밤, 또 다시 레몬트리 상상을 하는 거야
아, 그 신향기 금종처럼 열리는,
탄일 종소리처럼 멀리 퍼지고, 따뜻하고 상큼한 노란색
의 눈물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꼭 먼길을 물어 물어서라도 레몬나무
상상을 심는거야 (P.42 )
移住
한갓진 고속도로 휴게소 백반 집, 손님이 남긴 반찬을
구석진 테이블로 옮기는 종업원이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늙은 남자와 대여섯 살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제육볶음에 볼 가득 상추쌈을 하는 아이가 남은
반찬을 테이블로 밀어주는 앳된 종업원을 엄마!하고 불
렀다 여자가 눈짓으로 아이를 나무랐다 늙은 남자가 자꾸
흐린 웃음을 흘렸다 식당 주인은 애써 모르는 척 문 밖으
로 고개를 돌리고 잘 마른 햇살도 무거워 과꽃이 고개를
떨어뜨린 가을 한낮,
낯선 나라에서 와서 가장이 된 女子를 바라본다 말끄러
미 바라보는 눈빛을 저어하는 얼굴에 짜디짠 바닷물이 넘
실대는 것 같다 아이는 어미를 닮은 맑은 눈망울로 여자
의 옷자락을 당기며 남의 식탁 반찬을 고사리 같은 손가
락으로 채근한다 흩어진 상추를 가지런히 포개어 아이에
게 건네는, 스물을 갓 넘긴 듯한 여자의 移住가 무거운 꽃
송이를 가누지 못해 한사코 햇살 속으로 기우는 한낮, 낮
달도 짜디 짠 제 얼굴을 지운다 (P.72 )
누군가의 백성
아파트 화단에 누군가 풀을 뽑고
꽃을 가져다 날랐다
흙을 파 헤쳐지고 거름 준 자국이 선명했다
달맞이꽃이 피고 지고
어느 날은 금잔화가 뭉텅이로 옮겨 왔다
아파트 경비원은 새로 이사 온 이가 예전에 살던 마당
에서
날마다 조금씩 옮겨 온 것이라 했다
커다란 엉덩이가 들썩이며 모종삽을 들고
꽃을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더 안쪽 부드러운 흙으로 옮기고 있었다
화단을 지나갈 때마다 꽃들과 눈맞춤을 했다
여름이 깊기도 전에 노랑나비가 팔랑이며 꽃과 꽃 사이
를 날아다니고
벌들이 잉잉거리며 꽃 속을 깊이 드나들었다
호주머니 속에 두 손을 심어 놓으며
시간이 칡넝쿨처럼
어제와 오늘을 칭칭 감고 올라갔다
벌과 나비를 불러 오지 못하는 내일
난 저 커다란 엉덩이의 백성이 되고 싶었다 (P.94 )
-박승자 詩集, <곡두>-에서
엄마는 돌아가신 후 말이 많아지셨다.
귀 바퀴에 앉아 이미 읽어버린 저녁을 끊임없이 간섭하셨다.
엄마 제발 그만 하셔요.
생전에 모녀가 아귀다툼 했던 것처럼 나는 저녁의 귓불을 탈탈 턴다.
읽어버린 저녁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돋아난다.
내 겹인 엄마에게 첫 시집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