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어
저 물의 만년필,
오늘, 무슨 글을 쓴 것 같은데 도무지 읽을 수 없다
몸속의 푸른 피로
무슨 글자를 쓴 것 같은데 읽을 수가 없다
지느러미를 흔들면 물에 푸른 글씨가 쓰이는, 만년필
지금은, 잉어가 되어보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잉어처럼 물속에 살지 않고서는 해독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잉어는, 오늘도 무슨 글자를 쓴다
캘리그래피 같은, 오늘도 무슨 글자를 쓴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의 얼굴을 닮은, 잉어의 얼굴
눈꺼풀은 없지만 그윽한 눈망울을 가진, 잉어의 눈
분명 저 얼굴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편지에 엽서에 무엇인가를 적어 내게 띄워 보내는 것 같은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는. 오늘
나는 무엇의 만년필이 되어주고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몸속의 푸른 피로, 무슨 글자를 썼을
만년필,
수취인이 없어도, 하다못해 엽서라도 띄웠을
만년필
그래 잉어가 되어 보기 전에는 결코 읽을 수 없겠지만
내가 네가 되어보기 전에는 결코 편지를 받을 수 없겠지만
그러나 잉어는, 깊은 잠의 핏줄 속을 고요히 헤엄쳐 온다
잉어가 되어보기 전에는
결코 읽을 수 없는, 편지가 아니라고
가슴에 가만히 손만 얹으면, 해독할 수 있는
글자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몸에, 자동기술(記述)의 푸른 지느러미가 달린
저 물의, 만년필- (P.24 )
전어
참, 동전 짤랑이는 것 같기도 했겠다
한때, 짚불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구워지던 것
비늘째 소금 뿌려 연탄불 위에서도 익어가던 것
그 흔하디흔한 물고기의 이름이 하필이면 錢漁라니-
손바닥만 게 바다 속에서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
어쩌면 물속에서 일렁이는 동전을 닮아 보이기도 했겠다
통소금 뿌려 숯불 위에서 풍겨질 때,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
온다는
그 구수한 냄새가 풍겨질 때, 우스갯소리로 스스로 위로하는
그런 수상한 맛도 나지만, 그래, 이름은 언제나 象形의 의미
를 띠고 있어
살이 얇고 잔가시가 많아 시장에서도 푸대접 받았지만
뼈째로 썰어 고추장에 비벼 그릇째 먹기도 했지만
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는, 헛헛한 속을 달래주던
장바닥에 나앉아 먹는 국밥 한 그릇의, 그런 감칠맛이어서
손바닥만 한 것이, 그물 가득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
그래, 빈 주머니 속을 가득 채워주는 묵직한 동전 같기도
했겠다
흔히 '떼돈을 번다'는 말이, 강원도 아오라지쯤 되는 곳에서
아름드리 뗏목 엮어 번 돈의 의미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바다 속에서, 가을 벌판의 억새처럼 흔들리는 저것들을
참, 동전 반짝이는 모습처럼 비쳐 보이기도 했겠다
錢漁,
언제나 마른 나뭇잎 한 장 같던 마음속에
물고기 뼈처럼 돋아나던 것 (P.58 )
미나리는, 웃는다
저기, 하천 바닥에 미나리가 심겨져 있다
제 몸속에 오염된 물의 정화 장치를 갖고 있는 미나리
사람들은 탁하고 더러워진 물에 일부러 미나리를 심는다
미나리를 심으면, 물고기가 죽어 둥둥 떠오르는 물은 맑게 걸
러지고
물고기는 눈을 뜬다 수초들도 혼절에서 깨어난다
미나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다
뒤틀리고 팔다리 꺾인 물을 끌어안고, 그렇게 깁스를 하듯 살
아간다
마치 깍두기를 소리 내지않고 씹는 법을 아는, 이처럼
오염되고 탁한 물에 잠겼어도, 입가에
바알갛게 발효된 고추의 빛깔 하나 묻히지 않는
희고 고른 치아의 그 입처럼
미나리는, 웃는다
제멋에 겨운, 바보처럼 웃는다
이 세계에 대해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그런
자기 방기로 이루어진 삶 같으면서도, 매혹적인
절망이라는 보수 하나, 얻지 않는
저 미나리
저기, 오염되고 탁한 하천 바닥에 미나리가 심겨져 있다
미나리는, 장바닥에 앉아 맛있게 국밥을 먹는 것처럼, 웃는다 (P.116 )
편지
우체함 속에
새 한 마리가 둥지를 짓고 오도카니 앉아 있다
마치 날개 달린 편지 같다
벌써 산란 때가 되었나?
올봄도 찾아온, 저 초대하지 않은 손님
마치 제 집에 가구를 들여놓듯, 지푸라기를 물어 나르며
풀 둥지를 짓고 알을 품고 있다
바깥의 생을 몸으로 체득한,
우체함 속의 집
지금 새가 알을 품고 있으니 우편물을 투입하지 마시압!
우체함 속의 편지 대신 들어 있는 새 한 마리가
꼭 봄의 농담 같은,
잉크로 타이핑으로 쓰이지 않은,
백지의 난(卵) 속에 실핏줄로 쓴, 살아 있는 편지가
죽은 활자 대신 살아 있는 숨결이 느껴지는 것
봄의 농담이 아니라
濃淡 같은 것 (P.120 )
-김신용 詩集, <잉어>-에서
김신용은 등단 이후 지금까지 사반세기 동안 중단 없이 시를 써왔으며 최근 더욱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동안 내놓은 여섯 권의 시집은 평탄치 않았던 시인의 생애를 반영하며 주목할 만한 개성을 드러낸다. 『버려진 사람들』(1988)과 『개같은 날들의 기록』(1990)은 비천한 삶의 체험과 강렬한 육체성의 분출로 우리 시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새로운 면모를 펼쳐 보인다. 『몽유 속을 걷다』(1997), 『환상통』(2005), 『도장골 시편』(2007), 『바자울에 기대다』(2011)에서는 체험의 직접성이 줄어드는 대신 서정성과 자연에 대한 통찰이 강화된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밑바닥 삶을 전전하던 시기와 자연 속으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된 시기의 차이가 크다. 자연은 삶의 상처와 고통을 인간 사이의 차별적 문제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생명의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연과 함께하며 삶에 대한 시인의 통찰력은 큰 폭으로 확대된다.
이번 시집은 자연에서 생활하면서 쓴 이전 시들과 유사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전 시들에서 자연 현상과 개인의 상처가 중첩되면서 고통의 기억으로서의 삶의 의미를 강화하던 것에 비해 이번 시집에서는 개인적 상념이 소거된 자연 현상에 대한 투명한 시선과 감각이 두드러진다. 자신의 체험을 포함해 삶의 고통과 상처의 흔적이 어른거리던 자연에서 인간적인 자취가 지워지고 자연 그 자체의 양태에 시상이 집중된다. 기억과 감상이 투사되던 자연의 이미지가 독자적인 감식의 대상이 된다. 시인은 자연과 자신의 거리를 뚜렷하게 인식하면서 자연 자체의 메시지를 파악하려고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