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연인들
당신의 눈동자가 지워지고 있다 내 오른 손이 당신을 향
할 때 눈동자에서 피어나는 꽃잎
당신의 발이 놓였던 길목마다 그늘이 놓였다가 사라지
고 꽃잎이 부유하는 순간
고개 숙인 발밑에 작은 우물이 생긴다 우물 위로 쏟아
지는 당신의 눈빛 그리고 잠시 머리위에 머무는 구름
당신과 나의 관자놀이를 겨눈 방아쇠, 수천의 꽃잎이 제
목을 꺾으며 낙하한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 몸을 숨긴 피카
소가 어린 애인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P. 27 )
물고기의 노래
지금 내 몸을 흔드는 것이
네가 지나간 여정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곳에서 길을 잃을 텐데
수초처럼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후렴구처럼 오래오래
네 귀를 쓰다듬어 줄 텐데
물살을 끌어안으며
투명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물고기의 노래를 듣는다 (P. 30 )
덤보로부터 덤보에게
난 또 다른 무게에 대해 생각 중이야 엄마, 오래전 엄마
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든 적이 있어 겨드랑이는
어둡고 좁았지만 내겐 늪처럼 아늑했어
매일 밤 눈을 감으면 코끼리가 하늘을 날아다녔지 커다
란 귀가 펄럭일 때마다 아이들은 발을 구르며 함성을 질렀
어 최고의 비행사 우리의 덤보. 하지만 엄마, 하늘을 나는
덤보의 몸은 왠지 쓸쓸해 보였어 덤보는 바람에 쓸려 다니
는 푸대 자루 같았거든 그런데 오래전 내가 놓친 풍선들은
지금 어디쯤에서 비행 중일까
지금 나는 발목이 드러나는 살구색 담요를 덮고 큼큼
엄마 냄새를 떠올리는 중이야 그리고 커다란 귀를 펄럭이
는 덤보를 상상해 너무나도 가벼운 자세로 하늘을 날아다
니는 거대한 푸대 자루와 그 가벼움이 주는 어색한 웃음
에 대해, 엄마 어쩌면 난 매일 같은 꿈을 꾸기 위해 잠이
든 건지도 모르겠어 내가 덤보가 되는 꿈 그런데 엄마, 누
가 우리의 귀를 모두 잘라간 것일까 (P. 59 )
로빈슨 크루소에게
비오는 거리예요
저만큼 내려앉은 하늘을 봐요
명징한 것은 모두 구름 위에 있어요
이곳의 풍경은 너무 낯익어서
사람들은 자주 길을 잃어버려요
단장을 쥔 노인의 등은 조금씩 기울어지고
엄마 손을 놓친 아이의 눈동자는
친구 몰래 주머니에 감췄던 유리구슬을 닮았어요
구름 속을 누군가 지나가고 있어요
여기예요,
여기까지가 나랍니다
창밖의 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어쩌면 이곳은 지나치게 관대한 곳인지도 모르겠어요
고여 있는 빗물이
발자국을 지우고 있거든요
여전히 비오는 거리예요
섬이예요
발자국의 시작이자 끝인, (P. 74 )
-한세정 詩集, <입술의 문자>-에서
비가 온종일 잠결처럼 내리는 날,
민들머리 형형한 눈빛의 피카소와 그의 총천연색,들 같은
연인들을 생각한다. 총천연색으로 제각각의 사랑을 쏟아 붓던,
민들머리 피카소의 연인들..울고 웃고 성내다 다시 미소짓는..,
물고기들에게 물 속은 공기 속, 일 것이다.
자유롭게 헤엄을 치며 놀며 먹으며 배설을 하며 살아가는.
그런데 우리 집 물고기들은 날랜 몸짓으로 춤을 추며,
고막속의 나팔꽃,처럼 노래를 부르지만
나의 귀는 그 노래를 듣지 못해 다만..뻐끔뻐끔 웃고 있다.
빗소리는 수영장에서 유영을 하듯 잘 듣고 있으면서 말이지,
< 아기 코끼리 덤보>는 나에게도 아들들에게도 서커스단
속에서 엄마코끼리가 덤보를 바라보는 것처럼 여전히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신나게 하늘을 날아 다니는데, 왜..디즈니가 동화
를 환각처럼 만들었을까? 비가 오는 날 만들었을까?
덤보하니까, 또 '꼬마 깜둥이 삼보'까지 떠오르네. 깜둥이가 뭐야, 에잇.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한없이 돌다 버터가 되어 버린 호랑이 버터,로 만든 핫케익을 삼보가 169개나 먹고도 여전히 배고파
했을 때, 철모르던 꼬마 나는 그저 맛있게만 보여 그림책을 읽으며 침을 꼴깍, 삼켰어. 요네하라 마리가
'미식 견문록'에서 <꼬마 깜둥이 삼보>를 얘기하기 전에, 이미 나도 그 기막힌 속얘기를 알아차린
슬픈 어른이 되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자주 술을 푸는 거야..슬퍼서 말이지..
나는 이렇게 비 오는 날, 한세정 詩人의 <입술의 문자>를 읽으며 놀고 있지만 정말
로빈슨 크루소,는 비 오는 날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을까,
앗, 비 온다고 그곳 혜화동에서 회포좀 풀자고 연통이 오는구나..할 수 없지.. 비 오는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