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고요한 여름밤, 각자 자기가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모두 눈을 감고 저마다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였다. 내 오른쪽에 앉은 시영이가 눈을 감고 제가 살아온 날을 조금 생각하다가 바로 호주머니 속 과자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시영이는 호주머니 속으로 자꾸 손을 넣어 과자를 조금씩 꺼내 선생님 몰래 입 속에 살짝살짝 집어넣었다. 내 왼쪽에 앉은 영환이에게서 나는 방귀 냄새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시영이의 몰래 과자 씹어 먹는 소리, 영환이의 방귀 냄새 때문에 내가 살아온 날들에 대해 자꾸 방해되긴 했지만 나는 최대한 허리를 곧추세우고 내 십오 년 인생을 생각하였다. 선생님이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음악은 약간 슬펐다. 생각하기에는 역시 신나는 음악보다 좀 슬픈 음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도 최대한 감정을 잡아 보려 애를 썼다. 감정이 잡히는 순간, 선생님이 갑자기 혼잣말로, 에이, 음악은 무슨 음악이냐, 자연에 오면 자연의 소리를 들어야지, 하면서 기껏 틀었던 음악을 탁 꺼버렸다. 선생님의 변덕스러운 행동으로 감정 잡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나는 내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려 다시 한 번 허리를 곧추세웠다.

 -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생각해 봅시다.

 우리 동네서 와서 우리 동네로 가는데요, 영환이가 대꾸했다.

 - 생각해 보라고 했지 대답하라고는 안 했다. 자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집에서 와 집으로 가는 건가,라고 영환이가 혼자 중얼거렸다.

 엄마 배 속에서 나와 무덤으로 가요,라고 승빈이가 말했다.

 아, 자식들, 말 되게 많네, 거. 말하지 말고 생각해 보라고, 생각.

 드디어 선생님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모두 조용해졌다.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고 사위가 조용한 속에 별들이 저희끼리 소곤거리는 것 같았다. 몇몇은 졸기도 했다. 한참 만에 선생님이 손바닥을 탁탁 치면서, 일어나라, 일어나, 조는 아이들을 깨웠다.

 - 자아, 각자가 살아온 날들에 대해 충분히 생각했는가?

 처음부터 졸기만 한 경수가 제일 크게 대답했다.

 그러면 경수부터 말해 봐라. 말할 때는 되도록 솔직 담백하게.

 경수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우리 엄마와 나는 스무 살 차이가 난다. 내 생일은 3월이다.  (P. 10~11 )

 

 

 

 

 -여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제가 말해 보지요. 보리밭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여름에 낮잠 자다 깨어났는데 문득 보이는 대청마루 가의 푸른 하늘, 그 푸른 하늘가의 감나무, 감나무 속에서 우는 매미, 매미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울자울 졸고 있는 닭 볏 같은 맨드라미.... . 맨드라미 꽃잎과 이파리로 묻들인 떡은 정말 아름다워서 함부로 먹을 수가 없었어요.

 

 - 오매, 감나무, 강릉에도 감나무가 있고만요. 우리 고향에는 감나무가 너무 많아서 산에 올라가서 보면 집은 안 보이고 감나무만 보였단게요. 감이 노랗게 물들면 다서 소금물에 재워 우린 감도 만들어 먹고 태풍 불어 떨어진 감식초도 만들고 겨울에는 홍시를 갈무리해 뒀다가 하나씩 꺼내 먹고.... .  (P. 28~29 )

 

 

 

 

 

 나는 화장실로 안 가고 숲으로 갔다. 이야기 시간이 끝나고 노래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켜는 기타 소리에 맞춰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무리와 떨어져서 듣는 음악 소리는 아름다웠다. 무리와 떨어져서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들도 아름다웠다. 열 다섯 살이면 외로움이 뭔지도 아는 나이지만, 아름다움이 뭔지도 알 나이라는 걸 나는 그 숲에서 알았다. 숲에서 나가면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노래 불렀다.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였다. 가슴 한 편이 싸해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나는 지금 강릉의 숲에 와 있다. 밤이 깊을수록 별들은 더욱 영롱하게 반짝였다.  (P. 30~31)

 

 

 

                                                                           -공선옥, <아무도 모르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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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5-26 10:24   좋아요 0 | URL
밤에 숲에 깃들었으면
아무 얘기 안 하면 더 좋을 텐데요.
그러면 아이들은 지난날도 생각할 테고
우주도 생각할 테고
꿈도 생각할 테고
사랑도...
또 주머니에 있는 과자도 배가 아파 방귀 나오는 것도
골고루 다 알아서 생각할 테지요...

appletreeje 2013-05-26 11:41   좋아요 0 | URL
참으로 맞는 말씀이세요...

2013-05-26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6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