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가 되는 법
도마 위에서 칼을 잡아보면 알 수 있지
양파를 썰거나 청양고추를 다져보면
왜 눈물이 나는 지 알 수 있지
칼 잡은 손끝에서 짜릿하게 감지되는 건
비명뿐이라는 걸
갓 잡은 생선머리나
돼지 혹은 소 닭의 세포조직에서
소신燒身 공양 직전의 묵언默言을 들을 수 있다는
도마 위에서 칼을 잡아보면 알 수 있지
진정한 요리사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한다는 걸
상상의 무덤을 만들어
그곳에 반드시 두 번 절한다는 걸
도마 위에서 잔파를 썰거나 마늘을 다져보면
알 수 있지
야성을 잃고 시래기가 다 된 줄기나 무
인동의 겨울을 지낸 장류醬類와의 결합을
결코 야합이라 하지 않는
숙성의 시간
태생이 다른 식재료를
손바닥 가득 쥐고 무쳐보면 알 수 있지 (P.12 )
추억도 생물이 좋다
마포 농수산물시장의 수산물 좌판은
한 주에 두 번쯤은 나를 오라고 한다
신출내기 요리사인 나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옛고향처럼 나를 자꾸 오라고 한다
좌판 위에서 번쩍이는 활기
생물 갈치는 요즘 너무 비싸고
국내산 낚시태 생태는 씨가 말랐다
생물 고등어 아니면 생물 꽁치나 멸치
품격을 갖춘 학 같은 저 신사 민어
부산 충무동시장에서 어머니가 데쳐내던 통오징
어
저녁 식탁에서 추억은 항상
초고추장처럼 입맛을 다시게 한다
한주에 두 번쯤 수산물 좌판을 찾아가는 것은
그곳에 적셔져 있던 고향길이 보여서일까
일흔 살이 넘어서도 나 장보러 간다 (P.14 )
잔치국수 한 그릇은
어머니 손맛이 밴 잔치국수를 찾아
이즈음도 재래시장 곳곳을 뒤진다
굶을 때가 많았던 어린 시절
그릇에 가득 담긴 국수 면발과
가득찬 멸치육수까지 다 마시면
어느새 배부르고 든든한 잔치국수
굶어본 사람은 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
잔칫집보다 넉넉하고 든든하다
잔치국수 한 그릇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갓 삶아 무쳐낸 부추나 시금치나물,
혹은 아무렇게나 썰어넣은 김장김치 고명 위에
어머니 손맛이 밴 양념장을 끼얹으면
젓가락에 감기는 국수 면발이
입안에 머물 틈도 없이
목구멍을 즐겁게 한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구를 위해
대나무 소쿠리엔 밥보자기를 씌운
잔치국수 다발
양은솥에는 아직도 멸치육수가 뜨겁다 (P.24 )
느닷없이 봄은 와서
봄은 화안하다
봄이 와서 화안한 까닭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느님이 하늘에다 전기 스위치를 꽂기 때문이다
30촉 밝기의 전구보다 더 밝은 꽃들이
이 세상에 일시에 피는 것을 보면
헐, 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
봄은 눈부시고 화안하다
사람과 세상이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긴긴 겨울밤은
하느님이 아직 스위치를 꽂지 않으셔서
어둡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느닷없이 봄은 와서
내 눈을 부시게 한다 (P.38 )
문상
-최하림에게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나는 그를 위해 향불을 피웠다
지상에서 우리의 관계는 오랫동안 따뜻했다
둘러싼 국화꽃 생화生花 속에서
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여 안녕
등을 돌려 영안실을 나오는 동안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여
나는 발을 헛딛는다
주차장을 찾지 못해 영안실 계단을
세 번이나 오르내리다
다시 영안실 빈소의 영정 속에서
오라고, 오라고 손짓하는 그를 보았다
친구여 안녕, 등을 돌리고
산자의 주차장을 기어코 찾아내
시동을 거는 동안
나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멀리 언덕 위 벚나무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P.80 )
-김종해 詩集,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