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국
호박 속보다 환한 호박꽃이다. 어젯밤 호박꽃 초롱
만들러 왔던 반딧불이가 다슬기 눈물 한 바람을 흘리
고 간 것인데 가마꾼 호박벌이 그걸 꽃가루에 비벼대
가마띠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자고 나면 한 뼘 두 뼘씩 뻗는 호박 넝쿨 애호박이
열린다 호박벌 닮았다 넝쿨손은 담벼락 한 귀 또 그
러쥔다
호박벌 가마띠 만지듯 조신조신 넝쿨손을 꼬고 애
호박은 호박벌 쏘이지 않게 숨겨다가 풋국 한 솥 끓
인다 (P.11 )
꽃밥
밥사발이다. 흰 이밥 고봉으로 잘 다독인 밥사발,
풀 쥐어뜯으며 배앓이하던 언덕
꽃 이파리 땅에서 뽑아 올린 빛깔이더냐, 밥 냄새
어디 하늘에서 내린다더냐 허공중에 차려내는 이밥
도화지에 그대로 퍼다 붙여두고 싶은 꽃밥
한 논배미 비워내면 밥이 나오는 근본은 안다 짚신
짝 툭툭툭 털어낸 흙이 산이 되었다는 신털미산, 꼴
보기 싫어도 꼭 한 번은 먹고 싶은 고봉밥 그 허기진
흙밥 숟가락 다둑이던, 두 번 세 번 다둑여 뜨는 삽질
숟가락
제 밥그릇은 안다. 제 밥그릇 꼭 있는 줄은 아는 농
투성이, 을미적을미적 제 밥그릇 속으로 모여들던 갑
오년 구시내, 구시발, 구시포*가 이 땅의 큰 밥그릇
아니던가
수북수북 이어지던 이팝꽃, 쇠죽 끓는 가마솥 (P.20 )
*구시:구유의 방언(마소나 돼지 들에게 먹이를 담아주던 그릇).
서울 아까시꽃
아까시꽃이 말이 많아졌다 서울 온 지 얼마나 되었
다고, 억억억 무엇이 불편하긴 불편한가 보다 견마잡
이로 함께 온 이팝꽃 악악악 딱히 무논의 개구리가
그리운 것은 아닌 성싶은데
어제는 늙은 소나무 하나 거푸집에 이리저리로 묶
여 오는데 뉘집 선산에서 오는 건지 대꾸도 안 했다 엄
지손가락 혈자리 따고 침 잘 놓기로 소문난 그 소나
무! 맞다 허리 굽은 것이나 황새 둥지 튼 그 자리까지
그 소나무 맞는데 그냥 지나쳐 버렸다 아파트 딱지
붙이러 가는가 본데 그 생각을 못 했다 속 좀 울렁대
도 이쯤 나앉는 것이 바람길은 좋은데 안심찮다 안심
찮다 (P.22 )
주름비단
딴짓하고 오는 비가 모과나무 등걸에 무단히 투정
이다
'툭 하고 떨어지는 한 소리가 있지'
돌아가신 작촌 시인께서 창가에 심어보라며 모갯덩
어리* 어렵게 싹을 내어주신 나무다. 끈적한 투정쯤
받아낼 만큼 자랐다 모갯덩어리 향이 깊다 젖은 모과
나무 등걸이 비단 주름보다 곱다
봄비 휘감고 모개나무 오늘은 낭자한 낭자한 길 나
서고 싶은가 보다 (P.57 )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토종 모과.
-진동규 詩集, <곰아 곰아>-에서
시인의 말
오목눈이의 눈짓
멧돼지가 고개를 넘고 있다. 고라니는 먼저 와 있었다.
건너 산마루에 점점이 보이는 작은 새 둘은 원앙이지 싶
다. 그놈들은 항상 붙어 다닌다. 지휘를 맡은 것은 덤불
속의 흰머리 오목눈이다. 앞개울의 물고기떼들은 이미 은
하의 물굽이를 넘나들고 있지 않는가. 백제금동대향로에
부조로 조성해놓은 미륵 법왕의 초례청 풍경이다.
이 옹골찬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한국문인협회
가 나섰다. 오목눈이가 퍽이나 좋은 일이라고 눈짓을 보
내왔다.
2013년 봄
진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