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판의 <르 코르뷔지에 : 언덕 위 수도원>을 보다가

 문득, 르 코르뷔지에의 책들을 찾아본다.

 르 코르뷔지에. 아주 오래전에 나의 서가에 꽂혀 있었던 그의 冊들 몇 권.

 

 

 

르 코르뷔지에, 새로운 ‘진실의 건축’, 라 투레트 수도원을 설계하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착공되기 한참 전에 이미 건축가가 정해져 있었고, 사전 준비도 거의 끝나 착공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착공 직전에 쿠튀리에 신부가 갑자기 계획에 개입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처음 설계한 건축가 노바리나는 나중에야 르 코르뷔지에가 수도원 건축가로 최종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밀려난 것은 도미니코회 수사 한두 명이 은밀히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며, 자신을 떨어뜨린 건축가를 찾아내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리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의 상대가 그보다 뛰어난 르 코르뷔지에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당사자인 르 코르뷔지에는 이런 모든 과정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해 준 롱샹 성당의 설계 역시 처음에는 노바리나로 결정되었다가 자기 차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역사의 평가는 언제나 냉정하다. 이 사건으로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사에 또 하나의 걸작을 탄생시킬 기회를 얻었지만, 노바리나는 이름을 떨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과 풍파를 겪는 동안 쿠튀리에 신부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걸었던 기대는 아주 단순했다.
“조용하며,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1953년 5월 4일, 르 코르뷔지에는 처음으로 수도원 건축 부지를 방문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전망이 탁 트인 아름다운 언덕 위에 서서 “이런 곳에 아무런 목적도, 의의도 없는 수도원을 짓는다면 그건 죄악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바퀴 둘러본 후 그는 무심코 끼적이듯 수도원의 외관 초안을 그렸다. 들판 위에 기둥을 세워 언덕의 경사를 그대로 살리는 형태로 그려진 이 초안은 훗날 실제로 완공된 수도원과 거의 일치했다고 한다.(본문 134~137페이지)

 

 

                                                -니콜라스 판, <르 코르뷔지에 : 언덕 위 수도원>-에서

 

 

 

 

 

 

 

 

 

 

 

 

 

 

 

 

 

 

 

 

 

 

 

 

 

 

 

 

 

 

 

 

 

 

 

 

 

 

 

 

 

 

 

 

 

 

 

 

 

 

 

 

 

 

 

 

 

 

 

 

 

 

 

 

 

 

 

 

 

 

 

 

 

 

 

 

스위스라는 무대가 좁았던 미술 천재

1965년 8월 27일 오전 11시, 코르뷔지에는 통나무 작업실을 나와 눈부신 지중해를 바라보며 산책길을 걸어 내려갔다. 수영복 차림의 그를 본 이웃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바보 같은 늙은이입니다. 그러나 아직 머릿속에는 적어도 100년 분량의 계획이 있죠. 그럼 나중에 봅시다!” 코르뷔지에는 바위 사이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의 피부는 지중해의 햇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적당히 그을어 있었고, 몸은 78세라는 나이답지 않게 곧고 단단했다. 오솔길로 내려간 그는 곧장 은빛 파도가 반짝거리는 바다로 걸어갔다. 의사는 그에게 해수욕을 하다가는 심장이 멎을 수도 있으니 절대 바닷물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짙푸른 지중해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잠시 후 해수욕을 하던 관광객이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고독한 사람, 급진적 사상가, 논객, 화가, 조각가, 가구 디자이너, 도시계획가, 공예가, 건축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었던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평생을 아끼고 사랑하던 지중해에서 사망했다.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다에 들어간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자살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의 정확한 사인은 심장발작이었다. 장례식은 1965년 9월 1일 루브르궁 안마당에서 치러졌고, 장례 행렬이 샹젤리제 거리를 지날 때는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당시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는 진혼사에서 그를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인 페이디아스(Pheidias)와 르네상스의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반열에까지 올리며 그의 공적을 기렸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는 죽기 한 달 전 출간 예정이던 책을 손보면서 이런 마지막 문장을 남겼다. “삶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렸고 최후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 [인물 세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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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8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8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04-08 04:28   좋아요 0 | URL
건축을 토목공사나 막개발로만 여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르 코르뷔지예 같은 분들은 참말 제대로 읽혀야 할 이야기라고 느껴요. 그런데, 이분은 시멘트를 너무 좋아해서... 늘 이 대목이 걸리더라고요. 시멘트를 안 쓰는 건축으로 뻗어 나가지 못한 대목이 아쉽달까요. 시멘트집이 사람한테 끼치는 나쁜 것들을 못 느꼈달까요.

그래서 저는 '픽터 파파넥' 같은 디자이너라든지 '하싼 화티' 같은 건축가한테 조금 더 눈길을 두어요.

appletreeje 2013-04-08 09:43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전에 하싼 화티의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를 참 좋게 읽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살펴 보니 역자가 '말하는 건축가'의 정기용님이시군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건축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말하신.

'의미'가 있는 질서를 만들어 내는 디자인 ,을 모토로 삼은 픽터 파파넥의' 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환경과 그가 사용하는 도구를 변형시키고 더 나아가 인간 스스로까지도 변형시키는 것이다.'가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2013-04-08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8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