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微動)으로 꽃은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종소리 (P.18 )
수필
씨감자는 반을 잘라서 묻지
자른 곳에 검은 재를 발라서 묻지
그리고 잊어먹지
공들여 잊어먹지
이마를 짚어주고 가던 손을 잊지
옆의 흙을 가져와 묻어주던 시간을 아예 잊어먹지
아니, 아주 잊어먹지 않을 만큼만 잊어먹지
눈매에서 싹이 오르지
아주 잊어먹지 않을 만큼만 싹이 오르지, 꽃이 피지
잘려나간 반을 흙 속에서 생각하지
눈감고 오래도록 생각하지
들키고 싶지 않을 만큼만 공들여 생각하지
그 사이 반이 하나가 되지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마음 가는 대로
열이 되지 (P.20 )
끼니
1
병실에 누운 채 곡기를 끊으신 아버지가
그날 아침엔 밥을 가져오라 하셨다
너무 반가워 나는 뛰어가
미음을 가져왔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소리로
그냥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아버지는 밥을 드셨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가셨다
2
우리는 원래와 달리 난폭해진다
하찮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가진게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한겨울,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한 노숙자가 자고 있던 동료를 흔들어 깨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먹어둬!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잖아 (P.22 )
꼬리는 개를 흔들고
버림받은 후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야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있기는 한 것인가
빨랫줄에서 한 바구니 마른 빨래를 담아와 개면서
하염없이 저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다보면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분명 저 길을 따라 올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생각
항상 먼저 너를 버린 나,
모든 과오는 네가 아닌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생각
개는 여전히 흰 목수국 옆
쨍쨍 해가 내리는 길 한복판을 지킨 채
앉아 있고
수국이 수국의 시간과 대적하지 않듯
누가 불러도 짖거나 꼬리 치지 않는,
진짜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지독한 기억 속으로
느릿느릿 오는 허기 속으로
끝끝내 버림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는
개야 (P.34 )
-고영민 詩集, <사슴공원에서>-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고영민, <악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