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가 많은 옷
주머니가 많은 옷을 보면
재경이는 너무 좋아 실눈이 되는구나
주머니가 많은 옷을 좋아하는 너를 보면
엄마는 지레 걱정이 앞서는데
저 많은 주머니를 주렁주렁 채우고 살려면
힘들고 피곤 할텐데 저 많은 주머니를
채우지 못해 맘 상하면 또 어쩌나 엄마는
네게 주머니 많은 옷 사줄 때 늘 망설이지만
재경아 지금 네겐 주머니가 많은 옷이
참 좋겠구나 주머니 하나에는 알사탕을
또다른 주머니엔 친구들에게 나누어줄
스티커를 또 다른 주머니에는 놀이터에서
갖고 놀 작은 장난감을 나머지 주머니에는
무엇을 넣을까 짱구머리를 갸웃거리며
궁리하는 네겐 주머니가 많은 옷을 사주어도
좋겠구나 작은 열매들처럼 볼록 튀어나온
너의 주머니들은 아직 엄마 걱정처럼
무겁지 않으니
고 작은 주머니에 어울리는 작고 귀여운
것들이 가득 찬 너의 주머니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래그래 이까짓 커다란 주머니
채우지 못해 안달복달하다 제 풀에
쪼그라들 그런 주머니 다 무슨 소용인가
너와 함께 있는 오늘 엄마는 그런
주머니를 잠시 잊고 주머니가 많이 달린
너의 옷을 기꺼이 산다 엄마의
주머니를 털어서
-성미정 詩集,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에서-
뭔가, 마음이 녹록해지고 싶을 때면 성미정의 詩를 읽는다.
나도 주머니가 많은 옷을 좋아했던 것 같다.
주머니가 없는 옷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어쩌다,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게 되면
어디 도망칠 구멍이 없는 그런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이 詩를 읽으며 문득 이젠 내 옷의 주머니가 언제부턴가, '숨어있기 좋은 방'이 아닌
잊혀진 방이 되었음을 만난다.
이제 내 주머니에는 빛깔같은 알록달록한 설레임이나 두근거림은 다 사라져버리고
무심히 쑤셔넣은 영수증이나 접혀진 지폐, 카드나 동전만이 언제 불쑥 손이 들어와 나갈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에이 씨 괜히, 슬프다. 간직할 게 별로 없게 된 이 삶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