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안의 신 - 진화론 시대의 종교에 대하여
존 호트 지음, 김윤성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과학과 종교의 화해 가능성에 관심이 있던 차에 이 책을 읽고 그동안 막연하게 했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 책의 결말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라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것도 10년이 넘었다. 최근에 전개되는 과학과 종교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이 궁금하다.

 

  현대 과학은 종교를 불필요한 존재 아니 오히려 사회의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기독교 근본주의는 창조과학 또는 지적설계론을 내세워 과학적 발견을 인정하지 않고 공격하며 고립된 종교를 형성하고 있다.

 

  저자 존 호트는 진화론에 집중하며 과학과 종교가 함께 공존할 때 생명 현상에 대해 더 잘 이해 할 수 있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 우주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풍요롭게 창조해나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진화론적 유신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내 관심에 따라,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의 주장에 대한 저자의 비판보다는 진화론적 유물론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위해서는, 과학과 종교에 각각 적합한 독법이 있으며 자연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 차원에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연을 읽는 독법과 종교에 접근하는 독법을 식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과학과 종교적 신념 사이에 내재한 듯이 보이는 대부분의 갈등이 바로 문자주의로 기울기 쉬운 인간들의 성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훈련받은 오직 한 가지 차원에서만 읽으려는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다.’ (58)

 

  각각의 독법을 익히고 자연적 사실과 종교적 차원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과학과 종교는 서로 반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학을 모르던 시대부터 존재했던 종교는 주로 인간 역사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우주, 진화, 등의 과학의 발견은 오히려 종교의 폭과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점점 확대되었다고 현대 과학적 인식에서 종교적 의미를 끌어내리려 한다면 영적으로 공허하고 도덕적으로 무능하며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과학이 존재하는 것의 모든 범위를 망라할 수 있다는 신념 자체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과학주의는 과학탐구의 논리적 결과가 아니라, 과학 안에서 아무런 근거도 갖지 못하는 가정일 뿐이다. (115)

 

  과학이 아무리 빨리 발전하고 이 세상에 대해 설명을 한다고 해도 인간의 삶은 과학과 비례해 더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또 행복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종교는 아무리 과학적 발견이 크게 이루어진다 해도 필요하다.

 

  유물론에 입각한 다윈주의자들은 진화론적 설명으로부터 형이상학적 교의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혼성적 독법을 구사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 헛된 궁극이론의 꿈은 다윈주의 주창자들뿐만 아니라 물리철학자들에게도 두드러진다. 다른 모든 범주를 막아버리려는 이런 망상은 창조과학자들의 창작물과 마찬가지로 진부한 독선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190)

 

  ‘과학적 탐구에서 신학적 형이상학을 성급하게 끌어들이는 것은 아직 남아있는 발견의 여지를 흐려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조직화된 복잡성에 내재한 형이상학적 뿌리로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현대 진화론적 유물론의 무능함은 진정한 궁극의 설명을 추구하는 인간 정신의 욕구에 대한 모욕이다.’ (190)

  다윈 전쟁은 과학과 종교 간의 충돌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형이상학의 충돌이라고 한다.

 

  ‘과학적 자연화의 방법이 근본적이고 궁극적이며 적합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설명하리라는 생각 자체는 과학이 아니라 단지 신념일 뿐이다.’(240)

 

  과연 과학적 발견들이 우주의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는가? 과연 과학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가? 과연 과학적 사실들이 진정한 실재를 향해 충분히 깊이 데려다 줄 수 있는가?이 질문에 대해 어느 누구도 확신에 차서 대답할 수는 없다.

 

  자연의 이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과학의 역할이라면 이해 가능성에 내재한 무한한 깊이에 대한 감각을 지켜주는 것은 종교의 핵심 기능이다. 저자는 현재 존재하는 종교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학은 과학적 발견 내용을 받아들여 종교가 다루는 내용을 확대해야 한다는 진화론적 유신론의 내용을 이야기 한다.

 

  ‘종교적 희망은 과학과 전혀 다르지만, 인간이 여전히 생성중인 거대한 우주의 일부라는 새로운 과학적 인식과 잘 들어맞는다.’(329)

 

  ‘신학은 이제야 신에 대한 생각을 진화의 커다란 규모에 맞추어 다시 되짚어 보기 시작하고 있다.’(332)

 

  ‘넓은 의미에서 보면 원죄는 지구에만 국한되는 병도 아니고 인간 세대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원죄란 단지 관련된 모든 존재의 실존에 수반되는 악의 불가피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원죄는 유한한 것들이 창조행위에 대해 보이는 필연적 반응이다.’ - 피에르 테이아르 드 샤르댕 (342)

 

  과학적 사실,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해 현재의 문제점이 많은 종교를 불필요한 것으로 파악하며 혼성적 독법의 실수를 범한 진화론적 유물론에 비해, 현재의 한계를 가진 종교가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여 영역을 넓히고, 과학이 미쳐 못 건드리는 존재의 깊은 차원으로의 인도를 책임져야 한다는 진화론적 유신론이 훨씬 따뜻하고 희망적으로 다가온다.

 

  저자가 서양 사람이라 종교를 그리스도교라는 틀로 설명하는 한계는 있지만 진화론적 우주론에서 말하는 우주에는, 무질서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수렴되는 궁극적 목적이자 약속인 장대하고 아스라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아마도 진화론적 유물론자들은 인정할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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