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하루하루 체념이 깊어지고, 휴대폰을 확인하는 횟수도 줄어들던 어느 날이었다. 모래내 철공소에서 특별히 주문한 등산 장비를 챙겨 나오던 중,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낯선 번호가 액정에 떠올랐다. 일순간 혹시 그녀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전화를 건 이는 모 TV 방송국의 정 피디였다.


정 피디는 일본 북알프스 등정을 다룬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며, 도준에게 카메라 감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방송 촬영 기술에 능숙하면서, 거친 지형에서도 빠르게 오를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번 외주 제작 프로젝트에 꼭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산 환경에서의 촬영은 단순한 카메라 기술을 넘어, 강인한 신체 조건과 산악 지형에 대한 이해까지 요구하는 일이었다. 도준은 늘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올랐다. 숫자와 기계에 밝았던 그는, 점차 방송 장비까지 습관처럼 다루며 자연스레 촬영 전문가가 되었다.


니콘 F3, 캐논 New F-1 같은 기계식 SLR 카메라는 배터리 의존도가 낮아 저온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했고, 광각부터 망원까지 다양한 렌즈군, 코닥 Ektachrome와 후지 Velvia 슬라이드 필름, 가볍고 견고한 삼각대, 카메라와 렌즈를 보호할 케이스와 여타 액세서리까지, 모든 장비를 짊어지고 산에 오르는 일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싸움이자, 완벽한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도준은 그런 극한 조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 익숙했다. 전문 산악인으로 쌓은 인연 덕에 방송 작업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고, 인디 필름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촬영 감독상을 받은 경력도 있었다.


국내 산을 배경으로 한 프로그램은 제작이 활발하고 인력 충원도 수월했지만, 해외 촬영은 절차가 복잡하고 예산 부담이 커 아무나 시도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이번 기회가 프리랜서인 도준에게까지 돌아온 것은, 외주 제작이라는 특수한 여건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선뜻 응답하지 못했다. 머릿속 어딘가를 여전히 서윤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서울을 떠나면 그녀와의 거리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은 불안, 그것이 그의 결정을 더디게 만들었다.


-도준 씨, 혹시 다른 일정 있으세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건가요?

-아닙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뭐라고 답을 드리긴 조금…

-김 부장님이 꼭 모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도준 씨 아니면 안 된다고요.


정 피디의 상사인 김홍식 부장은 산악 프로그램에 특화된 베테랑 프로듀서였다. 도준도 김 부장의 프로그램에 여러 번 참여한 터라, 그에게 빚진 마음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김 부장은 산악 촬영의 까다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험난한 환경에서도 제 몫을 해내는 사람으로 도준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번에 김홍식 부장님도 함께 가시나요?

-아뇨, 정년 퇴임을 앞두고 뉴욕으로 휴가를 떠나셨어요.

-그렇군요.

-그래도 일본 현지 사정에 밝은 도준 씨가 함께하면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꼭 부탁드리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도준은 문득 김 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철저하고 노련한 모습, 여러 산악 프로그램에서 함께했던 순간들이 선명했다. 그가 하필 이 시점에 자신을 추천했다는 점이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영광이네요.


일본 북알프스는 도준에게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긴 방황 끝에 처음 마주한 그 광활한 풍경은 부모를 잃고 상처투성이였던 어린 소년에게 산악인의 꿈과 생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곳은 추억이 아니라, 그의 삶이 다시 시작된 출발점이었다.


‘어쩌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카메라를 메고 바삐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그녀를 잊진 못해도 갑갑한 생각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년 네팔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확보라는 이유도 있었다.


‘낯선 환경과 새로운 일은 삶의 갈림길에서 돌파구가 되곤 하지. 그녀와의 인연도, 어쩌면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지도 몰라.’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그 기대는 조심스럽게 그의 마음을 부추겼다.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일본 북알프스 산맥이 또다시 자신의 삶을 이끌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는 정 피디의 제안을 정중히 받아들이고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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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한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타멜 중앙로에 전깃불이 돌아오자, 외국인 거리 특유의 활기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곗바늘과 정지된 여백의 순간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낡은 릭샤를 끌던 운전사가 천천히 멀어지고, 옷 가게와 기념품 가게, 타로 점집 앞에도 불빛이 번지며 거리 전체가 다시금 살아 숨 쉬었다.


삼거리 반스 책방 앞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군밤을 팔고 있었다. 도준은 환한 불빛에 이끌리듯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매장 안에는 여행객들이 두고 간 중고 서적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고, 장식장 위에 정갈하게 놓인 그림엽서와 기념품들도 네팔 전통의 색감과 문양으로 이방인의 시선을 끌었다. 


도준은 작년도 판 ‘론리 플래닛’ 가이드북을 잠시 넘겨본 뒤, 지도들이 꽂혀 있는 섹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다양한 지역의 지도를 살펴보다가, 마침내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지도를 뽑아 들었다.


잠시 후, 다시 거리로 나온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의 고즈넉한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분주히 오가고, 식당에서는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함께 샤데이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Smooth Operator’가 흘러나왔다. 옷가게에 걸린 전등 불빛은 진열대 위 기념 셔츠와 손뜨개 모자, 두꺼운 스웨터들을 은은히 비추었다. 흘러넘치듯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원색들이 밤 풍경 속에 생기를 더했다.


기념품 가게 앞을 지나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What time is it?


그는 무심코 왼손을 들어 올려 손목에 차고 있던 아보셋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느닷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신기하게 생겼네요. 이건 무슨 시계예요?


횡계 별장, 목요일 오후.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던 장면이 아직 선명한 필름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차에 몸을 싣고 사라진 후로, 도준은 삶의 중심을 잃고 무기력한 시간 속을 맴돌았다. 매일같이 오대산 자락을 달리던 일상의 리듬도 흐트러졌다. 그녀가 없는 횡계는 아무도 없는 숲의 적막처럼, 이제 어떤 의미도 건네지 못했다. 결국 일주일 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충동적으로 서울 방향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그녀가 있는 도시로 가자.’


사랑이라는 열병에 잠식된 영혼은 텅 빈 갈증에 쫓기듯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그녀가 일하는 인사동 거리를 서성였다. 그림자만이라도 스칠까 하여 리온 갤러리 주변을 배회하는 일만이 그의 결핍을 붙들어두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으나, 운 좋게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두어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철없던 시절의 무모한 격정은 이미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횡계 숲길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줄곧 마음을 옥죄었다.


-당신 누구야?


낯선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이명처럼 귓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약혼자였다 해도 하루 전 자신이 적어준 번호가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 의문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누군가의 보호와 강력한 견제 안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앞날이 예정된 사람 앞에 무턱대고 나서는 일은 결국 불필요한 혼란만 초래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확실성과 자신감의 결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로체 남벽이라는 치명적인 도전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한, 그 어떤 약속이나 책임도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다 해도, 언젠가 자신이 비겁하게 그 손을 놓아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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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네팔은 바닷길이 없는 지형 탓에 오래도록 연료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그 고단한 일상 속에서 잦은 정전은 이미 흔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여느 날처럼, 타멜 거리가 갑자기 암흑에 잠기자 상점가 곳곳에서 가스등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빛들이 어둠을 타고 번져가며, 거리는 차츰 밤의 몽환적인 숨결을 되찾았다. 어두운 골목을 가르는 빛의 물결에는, 어디선가 되살아난 듯한 낯선 노스탤지어가 피어올랐다.


뚜벅뚜벅, 어둠이 내려앉은 포석 위로 도준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돌이 울퉁불퉁하게 깔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무언가 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듯한 공허가 깊어졌다.


골목 끝 담배 가게 앞에 이르러 그는 걸음을 멈추고, 짙어가는 밤하늘을 막막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무심결에 흘러나온 한숨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이 지독한 우울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가?’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 다시금 강박처럼 떠올랐다. 그녀가 탄 자전거는 앞으로만 곧장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나에게는 한순간의 망설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깊은 회한에 몸서리쳤다. 철이 든 후로 자신이 이토록 어리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죽음의 경계에 익숙해진 서른다섯의 사내가, 울음을 삼키는 아이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로운 여자와의 만남이나 격렬한 연애 감정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녀와의 이야기도, 잃어버린 분홍신을 되돌려주는 그 순간까지라고 믿었다. 그때가 되면 오랜 숙제를 끝내고,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 인연의 끝자락에서 그는 아직도 그녀의 분홍신을 한 줌 쓰라린 꿈처럼 품고 있었다. 수시로 가슴을 짓누르는 멜랑콜리한 감각은, 도대체 언제부터 드리워진 그림자일까. 왜 그녀라는 흔적 하나를 이토록 지워내지 못하는 걸까.


그녀를 낚시터로 데려가기로 했던 그날, 도준은 옆 샛길에서 튀어나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검은색 BMW를 보고, ‘혹시 그녀의 약혼자일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는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했다. 한동안 긴장된 시선으로 차창 너머를 응시하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그녀에게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숨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낮게 뱉은 한마디가 가볍게 떨렸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낯선 남자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당신 누구야?


도준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목구멍 언저리까지 어떤 말이 치밀어 올랐다가 이내 스러졌다. 무례한 말투의 이 남자가 그녀의 약혼자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날카로운 쇳조각처럼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신이 던진 단 하나의 질문 같았다. 너는 누구인가. 그녀에게 너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감히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이 번호가 왜 여기 있어? 당신 누구야?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거칠게 다그쳐왔다. 휴대폰은 손안에서 납덩이처럼 무거워졌고, 도준은 자괴감에 잠긴 채 끝내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검은색 BMW가 막다른 길 끝에서 다시 돌아 나온 건 십여 분쯤 지나서였다. 멀리서도 그녀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불길한 상상이 이 순간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 안의 침묵 속에 고립된 채, 그 어떤 움직임도 허락되지 않는 처지였다. 고개를 돌릴 수도,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녀에게, 나는 어떤 의미인가.


대답 없는 메아리, 응답받지 못한 질문이 심장을 짓눌렀다.


스물두 해 만에 기적처럼 다시 찾아온 인연이, 수많은 갈등과 망설임을 남긴 채 이번에도 그의 곁을 천천히 지나치고 있었다. 다시 그녀를 영영 잃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용천 계곡, 세찬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소녀,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소년의 인공 호흡. 그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오래된 진실 하나로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약혼자보다 앞선 인연이었다고, 처음 사랑이고 첫 키스였다고 말하는 건 제정신 아닌 사내의 헛된 고백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없는 미래를 향해 곧장 달려 나갔고, 그는 여전히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여기 홀로 서 있었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헤어진 그때부터 거의 매 순간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었고, 신열처럼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몹쓸 역병과도 같았다. 사랑인지, 연민인지, 혹은 질투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은 채 오직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만 각인된 그녀의 얼굴이 끊임없이 눈앞을 맴돌았다.


야박하게도 그녀에게는 끝끝내 전화 한 통 없었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화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이미 완벽하게 다른 세계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녀가 무슨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겠는가. 번듯한 약혼자와 축복된 결혼식, 안온한 가정의 울타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그녀와 함께한 기억들조차 한 겹 베일에 싸인 듯 점점 흐려졌다. 얼굴 모습과 목소리, 수줍은 미소조차 아득한 장막 너머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어쩌면, 이게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그는 타이르듯 자신에게 말했다. 따뜻하고 안전한 삶이, 결국 그녀에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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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파노라마 포인트’ 정원에서는 소박하지만 활기 넘치는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었다. 한국에서 온 원정대와 방송사 관계자, 신문사 기자, 세르파들이 길쭉한 나무 테이블에 빽빽이 둘러앉아 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왁자한 대화가 밤공기를 데웠다. 허공에 매달린 노란 전구는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며 천막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바비큐 그릴에서 피어오른 뿌연 연기가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자욱이 퍼져나갔다.


도준이 문형근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들뜬 분위기는 한순간 숨을 고르듯 가라앉았고, 몇몇은 도준의 얼굴을 확인하며 긴장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 틈에서 작달막한 키에 왜소한 체격을 지닌 사내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마나슬루 원정대의 대장이자, 이름만으로도 회자되는 인물, 김봉산이었다.

 

도준보다 열 살 위인 그는 8천 미터급 14좌 가운데 10개를 완등하며, 한국 산악계의 전면에 나선 지 오래였다. 그 놀라운 성과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TV 프로그램과 광고 모델 활동을 통해 더욱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도준에게 고산등반의 본질은 단순히 정상에 오른 ‘횟수’가 아니라, 어떤 루트를 택했는지, 어떤 태도로 산에 접근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 점에서 김봉산은 늘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고, 본인 또한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어느새 마흔 중반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생의 전부를 건 도전이기보다, 명예와 생계를 위해 반복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을 업으로 삼아 왔던 그는, 등반이 더 이상 특별한 선택이 아닌, 그저 오래 해온 ‘직업’이 되어버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점에서 도준은 김봉산과 전혀 결을 달리했다. 체질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고, 지금껏 완등한 8개의 봉우리 중 5개는 웬만한 고수들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난이도가 극도로 높은 루트들이었다.


기록으로 따지자면 김봉산이 앞서 있었지만, 실력만큼은 도준이 단연코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방향도 방식도 다른 두 사람이 오늘 이 정원에서 마주한 것이다.


-아, 준이 아냐. 여기서 또 보네.


김봉산이 술잔을 내려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여전하시네요. 이번엔 마나슬루에 오르신다고요?

-괜히 또 가보는 거지, 뭐. 벌써 두 번째야. 근데 넌 또 뭘로 우릴 놀래킬 작정이야?

-놀래키다뇨. 별말씀을요.

-내가 실없는 말 하는 줄 알아? 허허. 자, 소개 좀 하지. 다들 이름은 아실 거야. 도준이야. 이 바닥에선 황소고집으로 꽤 이름난 친구지.


그는 연거푸 손짓하며 사람들을 돌아봤다.


-이쪽은 방송 촬영하러 같이 온 최연걸 피디.

-지면을 통해서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작년에 K2 등정하셨죠?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피디가 정중히 명함을 내밀었다. 도준은 예의상 한 번 들여다본 뒤, 곧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이쪽은 카메라맨 김상일 씨, 오늘 바비큐 파티의 물주인 윤종일 기자, 우리 팀 막내 이종학 군… 어, 한 명 더 있었는데 어디 갔지?

-자, 자, 이제 좀 마십시다. 배고파 죽갔구만.


문형근이 너스레를 떨며 먼저 자리를 잡았다. 도준도 빈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았다. 가볍게 허기를 채운 뒤, 적당한 순간에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때 남자 요리사가 잘 구워낸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커다란 은쟁반에 담아 왔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안줏거리와 생 미구엘 병맥주, 쿠쿠리 럼, 좁쌀을 발효시켜 만든 네팔의 전통주 '똥바(Thomba)', 그리고 누군가 인심 좋게 꺼내놓은 발렌타인 17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김봉산이 발렌타인을 들어 올리며 잔을 권했다.


-준아, 좀 마셔라. 방금 막 서울에서 온 길이지?

-예.

-우린 도착한 지 일주일 넘었어. 마저 준비하려면 사나흘 더 있어야 할 것 같고.


도준은 묵묵히 잔을 털어 넣고, 김봉산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낯선 얼굴이 하나 늘어난 탓인지, 술자리의 공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그는 방송국 피디와 몇 마디 주고받고 나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았다. 가벼운 농담과 허세가 뒤섞인 분위기보다는, 혼자 밤길을 걷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난 잠깐 볼 사람이 있어서요. 나중에 봐요.


문형근이 좀 더 있으라며 그의 옷깃을 잡았지만, 그는 끝내 그 손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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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이다. 북쪽에는 에베레스트를 포함해 해발 8000미터가 넘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장대한 벽처럼 이어지고, 남쪽의 테라이 지역에는 정글과 늪지대, 초원이 어우러진 국립공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도준이 일본과 방콕을 거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한 건 4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트리부반 국제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여행자들의 거리인 타멜에 도착했을 무렵 도시는 이미 해거름 녘의 어둑한 그림자가 골목마다 짙게 깔려 있었다.


오래된 건물 지붕 위에도 푸르스름한 밤의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중앙로에 이르자 식당과 상점들이 빽빽이 늘어선 거리는 환한 불빛과 인파로 묘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낡은 차량이 뒤엉킨 사이로 자전거와 릭샤가 아슬아슬하게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도준은 곧장 타멜 중심지 인근의 ‘파노라마 포인트’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한국인 등산가 문형근이 운영하는 이곳은 네팔을 찾는 한국 산악인들과 여행객들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다. 


그는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채 택시 운전사를 뒤따라 로비로 들어섰다. 라운지에서 신문을 읽던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두 팔을 벌리더니 크게 소리쳤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도준이 아냐. 이, 녀석!


도준이 배낭을 벗기도 전에 문형근이 달려와 얼싸안았다.


-형, 잠깐만, 이것 좀 내려놓고요.


도준은 배낭을 벗어 한쪽 벽에 기대 놓았다.


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도준의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잃어버린 동생이라도 다시 만난 듯 몹시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실 때가 됐을 텐데, 어째 이 귀신이 안 나타나나 했지.

-그래서 이렇게 왔잖습니까. 그동안 잘 계셨수?

-그럼. 나야 일 년 열두 달, 만고땡이지. 허허.


택시 운전사가 카운터 앞에 짐꾸러미들을 내려놓고 뚱한 얼굴로 기다렸다. 도준은 350루피를 건넸다. 택시비와 팁을 포함한 액수였다.


-통관하는 데 별문제 없었지?

-네, 그럭저럭요. 빈방 있어요?

-자식, 아무려면 너 하나 재울 방 없겠냐. 정 없으면 마누라 쫓아내고, 나랑 자면 되지 뭐.

-형수님이라면 몰라도, 문 선배는 절대 노 땡큐입니다.

-애가 갑자기 부끄러움을 타네. 얌마, 팔십육 년 마칼루에서 한 달간 동거한 걸 벌써 잊었어?

-그 코 고는 소리… 와, 진짜! 그때 생각만 해도 아직 제 머리가 어질어질해요.

-얘가 서울에만 가면 성격 개차반 돼서 돌아온단 말이야. 인간이 언제 되려나? 아무튼 앉아.


문형근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도준은 배낭에서 디스 담배 한 보루를 꺼내 건넸다.


-그래, 나는 담배나 피우다 뒈져라, 그 얘기냐? 자식, 고맙다.

-외국 나오면 한국 담배가 그립잖아요. 여긴 어때요?

-늘 똑같지. 네팔 시계는 멈춰 있는 거 몰라? 그게 매력이지. 그래서 내가 여기 붙어 사는 거고.


그때 식당 쪽에서 누런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노라마 포인트’를 관리하는 세르파 체링이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도준 형, 안녕하세요. 오늘 비행기로 들어오신 거예요?


오랫동안 한국 원정대 곁에서 일을 해온 그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응. 체링, 그동안 잘 있었니?

-그럼요. 잘 있었죠. 저 두 달 전에 결혼했어요.

-그래? 총각 신세를 면한 거야? 어쩐지 얼굴빛이 훤해졌네.

-제 와이프도 여기서 일해요. 한국 요리 잘해요. 미역국, 닭도리탕.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체링은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문형근이 도준의 짐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체링, 이것들 이층으로 옮겨. 이백칠 호 비었을 거야.

-알았어요. 도준 형, 나중에 또 얘기해요.


체링은 카운터에서 열쇠를 꺼낸 후 큰 배낭부터 번쩍 짊어지고는 작은 것들도 주섬주섬 챙겨 들고, 정원으로 향하는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객실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목조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준이 묵을 방으로 가려면 바깥쪽에 설치된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열린 문 너머로 등산복 차림의 남자들이 술자리를 벌이며 둘러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

-서울에서 신문사 기자들이랑 방송국 사람들이 몰려와서 한바탕 소란 피우는 중이야. 팔일오 특집 찍으려고 마나슬루에 올라간대. 김봉산 대장이 이끄는 팀이지. 야, 너는 진짜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났나 보다. 마침 새끼 돼지 한 마리 잡았거든. 자, 우리도 나가서 한잔해야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안 낄게요.

-얌마, 이제는 사람들하고도 좀 어울릴 줄 알아야지.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안 모이는 법이야. 같은 동네 사람들인데, 인사는 해야지.


도준은 평소에 남들과 쉽게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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