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베이스캠프에는 한국에서 함께 떠나온 원정대가 두 사람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 멀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요! 저기 와요!


본부 텐트 앞에서 망을 보던 대원 하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몇몇 발 빠른 대원들이 달려 나가, 정상 공격을 마치고 돌아온 두 남자를 조심스레 맞아들였다.


원정대 대장 우태길은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휘청거렸다. 탈수로 갈라진 입술과 까맣게 변해가는 손가락 마디는 그의 위태로운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동상이 심한 오른손은 미세한 자극에도 극심한 통증을 불러왔다. 절단을 피하려면 혈관을 확장하는 응급 주사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성호 역시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강인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험난한 하산을 무사히 마친 자부심과 동료들과 다시 만난 안도감이 그의 마음 깊숙이 차올랐다.


-이성호, 축하해. 우리 원정대 대표로 로체를 등정한 기분이 어때?

-형님이 저 대신 올라가셨어야 했는데요.

-무슨 소리야. 네가 잘 서포트해줬으니까, 대장도 마음 든든했을 거야.

-고마워요. 그런데, 도준 형... 지난번 단독 등정, 정말 성공하신 거 같아요. 로체 남벽을, 그것도 산소통 없이 혼자서요.

-그게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성호는 품속에서 알루미늄 캡슐을 꺼냈다.


-정상에서 이 서바이벌 키트를 발견했어요. 준이 형 것 같아요. 2년 전에 여기서 실종된, 도준 선배님이요.



그 순간, 주위는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도준’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 앞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캠프 내에서 최연장자인 문형근이 앞으로 나와 은색 캡슐을 건네받았다. 이번 정상 공격에 대한 우려와 책임감이 그의 얼굴에 짙게 어려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도준과 호형호제하며 지내온 터라, 누구보다도 그의 고유한 습관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알루미늄 통에 감긴 파란 테이프를 확인한 순간, 문형근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뚜껑 위 ‘DJ’라는 이니셜은 도준과의 기억을 되살리며 가슴 한복판을 스치듯 아릿한 슬픔을 남겼다. 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밀려드는 감정의 물결을 다독였다.


-이거 준이 형 것 맞지요?


이성호가 재촉하듯 물었다.


-분명하군. 이건 도준 거야.


문형근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노라마 사진 찍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데, 뭔가 발에 걸리는 거예요. 주변을 좀 파봤죠. 태길이 형이 한눈에 알아봤어요. 이거야말로 도준 선배님이 혼자 로체 남벽을 돌파한 증거물이잖아요.

-너희가 그걸 찾으러 거기까지 간 거구나. 고맙구나, 정말.


문형근은 착잡한 심정으로 로체봉을 올려다보았다. 능선 위 험악한 삼각 직벽과 눈 덮인 흰 봉우리가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슬픔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아직도 저 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도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히말라야에 바쳐진 성스러운 청춘은 여전히 동면하듯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외롭고 안타까웠을까.’


도준의 등반 실력과 재능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여러 의문을 제기했다. 2년 전 봄 이미 혼자 정상에 올랐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기에 세상을 등진 채 어딘가에서 홀로 살아 있을 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이라는 존재가 도준을 선택한 것처럼, 그는 태생부터가 거기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고독한 성취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정확한 등정 기록도, 사진 증빙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의 로체 남벽 등정 성공을 단언할 수 없었다. 도준은 결국 그 산에서 실종되었고, 한때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사라졌다. 그의 단독 등정 여부는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고, 그를 사랑한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점차 바람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


문형근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되뇌었다.


‘도준, 자네가 로체 남벽을 올라간 증거가 지금 내 손안에 있어.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룬 거야. 이제는 편히 눈을 감게나.’


로체봉 정상에서 도준의 서바이벌 키트를 찾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이토록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어쩌면 신의 계시였는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아직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도준이 남긴 그 흔적은 우연한 기적이자, 설명할 수 없는 신비였다.


저 높은 설산을 바라보는 문형근의 눈가가 떨렸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자 지나온 시간의 아쉬운 잔상들이 떠올랐다. 그는 손바닥으로 먹먹한 가슴께를 눌러 가며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리운 추억들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산에 대한 거창한 꿈을 방패막이 삼아 너무 오랫동안 비관적인 감상주의자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글·그림 김미진

 

저 높은 수직의 공간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갈망. 히말라야, 고도의 한계 끝자락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과 운명을 초월하는 고독한 투쟁이 필요하다. 어딘가로 오르는 길이 허락되었다면, 다시 내려가는 길 또한 존재할 것이다.


두 남자의 하산길은 오름의 여정보다는 덜 힘들었지만, 험난한 구간을 피해 훨씬 먼 길을 우회해야 했다. 얼음빛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그들은 하늘 가까운 빙벽을 마주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쉬지 않고 이어진 가파른 하강 속에서, 어디까지 내려온 걸까. 길이 조금씩 수월해지자 등반의 긴장감은 풀리고, 몸속 깊이 스며든 피로가 젖은 눈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날씨는 다행히 맑고 하늘도 푸르렀지만, 매섭게 휘몰아치는 냉기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은 점점 굳어갔다.


우태길은 오른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얼어붙은 손가락은 신경을 찌르는 고통을 안겼다. 산소통의 무게를 잊으려 그는 이를 악물고 온몸을 밀어붙였다. 이성호는 선배의 상태를 살피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고, 불안은 끝없이 밀려왔다. 베이스캠프까지 이어진 길은 심신을 소진시키는 마지막 시련이자, 생과 사의 경계에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계속되는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였다.


다음날 새벽, 그들은 캠프2를 거쳐 아이스폴을 통과했다. 해발 7,200미터.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이 지점까지 내려왔지만, 두 사람의 다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체력 고갈과 산소 부족은 하산길의 눈밭을 더욱 미끄럽고 위태롭게 만들었다.


우태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소통 밸브를 돌려 공급량을 높였다.


-조금만 더 견디자. 조금만.


그의 숨결은 거칠게 이어졌다.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성호의 발걸음도 점점 느려졌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기울어지면서 서너 번 휘청거렸다. 그래도 젊은 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가 존경하는 선배를 돕고자 한 걸음씩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겨우 움직였다.


7,000미터 고지를 지날 때, 그들은 또 한 차례 지옥 같은 구간에 접어들었다. 하산의 피로가 묵직한 돌덩이처럼 온몸을 짓눌렀다. 하체의 힘이 거의 빠져나간 상태에서 눈 덮인 바위와 미끄러운 경사면을 넘는 매 순간이 공포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성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발을 디딜 때마다 균형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더욱 낮췄다. 그의 눈에는 생존에 대한 간절한 의지와 삶에 대한 뜨거운 애착이 서렸고,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우태길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왔다.


이틀 후, 우태길은 탈수와 동상으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한 손으로 자일을 붙잡은 채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 끝내 주저앉았다. 이성호는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어깨를 힘껏 부축했다. 바로 그때, 아래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베이스캠프의 깃발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배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버텨요.

-그래. 그렇구나.


두 사람의 눈빛에는 마침내 끝이 보인다는 안도감이 번져갔다. 그들은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쥐어짜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글·그림 김미진


2000년 5월 17일 오후 2시경. 한국 원정대원 이성호는 그토록 멀고 고된 길을 걸어, 하늘과 맞닿은 수직의 극점, 로체봉 정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숨소리는 거칠었고, 몸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나 그는 얼어붙은 눈과 빙하 위를 지나 묵직한 걸음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정점에 아이스 피켈을 깊숙이 박고, 태극기를 펼쳤다. 바람결에 펄럭이는 깃발 하나. 그는 가슴이 타는 듯한 환희에 몸을 맡겼다.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 속, 온몸이 떨리던 전율의 순간이었다.


-올라왔어. 드디어.


그의 얼굴에는 오랜 여정의 피로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고글 너머로 붉게 부푼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고, 입술에는 따개비처럼 굳은 물집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방한모의 족제비 털은 얼어 터진 뺨을 거칠게 스쳤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천계, 까마득히 높아만 보이던 로체봉 정상에 지금 그는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조차 실감은 희미했다. 여기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넘어선 또 다른 변방 지대. 숨이 막히도록 희박한 공기 속, 신들의 자치 구역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끝없는 지평선이 완벽한 원형을 그리며 눈앞에 펼쳐졌다. 이성호는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발 아래, 층층이 쌓인 설빙 절벽이 아득히 뻗어 있었고, 그 너머로 날카롭게 치솟은 눕체의 첨봉이 손에 닿을 듯 다가왔다. 에베레스트는 희뿌연 설연을 휘날리며 하늘 끝을 향해 솟구치고, 남쪽 어둠 너머에는 암벽에 가려진 마칼루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발밑 깊고 깊은 낭떠러지에서는 구름이 고요히 흐르고, 돌풍에 휘말린 눈발은 황량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해발 8,511미터. 로체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아득한 비현실의 경지, 무한한 꿈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듯했다.


-결국 우리가 해냈어!


조금 늦게 정상에 오른 등반대장 우태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로체야! 우리가 왔다! 드디어 올라왔다!


두 사람은 어깨를 힘껏 끌어안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야호, 야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정상의 설원 위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지독한 사투로 점철된 지난 7일간의 여정은 이 순간, 아득한 꿈처럼 가볍고 현실감이 없었다. 무슨 말로 이 감각의 온도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쁨과 숭고함을 초월한 순백의 감정,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초현실적 떨림이었다.


이곳, 산소마저 극도로 척박한 고지에서는 인간의 감정 또한 무중력 속을 부유하며 그 경계조차 아스라이 흩어져갔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고도가 존재하듯, 죽음의 계곡을 넘어 도달한 히말라야의 정상에서 인간의 감정은 점차 실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이 순간을 억지로 붙들려 하지 않고, 온몸으로, 온 감각으로, 정상에 선 감동을 고요히 흡수하는 것뿐이었다.


-베이스캠프에 무전을 쳐야겠군.


우태길이 무전기를 추켜들고 발신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성호는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세계의 지붕이 첩첩이 뻗어나간 장엄한 풍경을 응시했다. 눈앞을 가득 채운 설산들은 묵묵히 침묵한 채, 인간 존재를 미세한 점처럼 삼켜버릴 듯 압도적이었다. 그는 북쪽에 우뚝 솟은 에베레스트를 배경 삼아, 웅장하게 솟은 설산의 봉우리들을 한 컷에 담았다. 이어 동쪽과 남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며 셔터를 눌렀다. 서쪽을 향해 마지막 인증 샷을 찍으려는데 아이젠 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리며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상체가 앞으로 기우뚱한 순간, 눈 속을 가르며 은빛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줄 한 가닥이 튀어나왔다.


-태길이 형! 여기 뭔가 있어요. 목걸이 같은데... 줄이 끊어졌어요.

-주위를 잘 살펴봐. 뭐가 더 있을지 모르니까.


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릴 듯 말 듯 이어졌다. 배터리는 충분했지만, 우태길은 정체 모를 불안에 사로잡혔다.


-베이스캠프와 교신이 끊긴 것 같아.

-큰일이군요. 날씨가 변하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 하는데...

-목걸이는 찾았어?

-잠시만요.


이성호는 장갑 낀 손으로 눈을 헤집었다. 차가운 알갱이 사이로 스치는 감촉이 문득 낯설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손끝에 닿은 건 작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지름 1센티미터, 길이 3센티미터 남짓한 은색 목걸이 통이었다.


-어? 이건... 서바이벌 키트네요?


초강력 알루미늄 소재의 서바이벌 키트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신원 확인 및 생존 정보를 담기 위해 제작된, 방수 캡슐 형태의 물건이다. 고산 등반자같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일종의 블랙박스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마련한 가장 원초적인 수단인 셈이다.


해발 8천 미터, 그 정상의 끝자락에서 발견된 이 조그마한 증언의 실체는 누군가의 마지막 침묵의 언어일 수도 있었다. 히말라야 고봉의 무심한 눈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표면에 붙은 얼음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는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DJ’라는 이니셜, 파란색 테이프, 그리고 로체봉 정상에 남겨졌다는 사실. 모든 퍼즐이 수수께끼처럼 떠올랐다가, 한꺼번에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도준, 그 자식 거야.


우태길이 눈가를 떨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뭐라고요? 준이 형이요?


이성호가 놀라 되묻자, 우태길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파란색 테이프, 뚜껑에 새긴 'DJ'... 이게 확실한 증거야. 그 녀석은 모든 장비에 파란색 테이프를 감아두곤 했지. 자일에도 말이야.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어.

-그렇다면, 도준 형이... 정말 2년 전에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는 건가요?

-알파인 스타일로, 오로지 혼자서.

-그게... 정말 가능했다고요?

-그럼. 도준이니까. 허허.


우태길은 한숨처럼 짧게 웃었다.


오늘 두 사람이 오른 길은 노멀 루트였다. 에베레스트 쪽 베이스캠프에서 이어지는, 비교적 잘 알려진 코스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전 도준이 향했던 곳은 전혀 달랐다. 로체 남벽. 세계 최강의 등반가들조차 번번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아직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벽이었다.


-도준 형의 실종을 두고 말들이 많았잖아요. 로체 정상에 올랐을 거다, 아니다...

-그 지옥 같은 로체 남벽을 혼자 해치운 거지.

-완벽하게 초등 업적을 이루려면, 정상까지 갔다가 무사히 내려와야 하는 거잖아요.

-로체 남벽을 끝까지 올라온 자는 아직 아무도 없었어. 도준이 내려오지는 못했을지라도, 올라온 건 확실하잖아. 이 서바이벌 키트가 증명하는 거지. 무산소 최초 단독 등정이야. 결국, 도준이 혼자 해낸 거야.


그는 알루미늄 통을 손에 꼭 움켜쥔 채, 끝없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설산들의 침묵과 그 차가운 광활함 속에서,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의 실종 이후 견뎌야 했던 참담한 시간들이 아른거렸다. 공기 속의 희박함마저 감정을 천천히 갉아먹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남은 것은 단 하나, 서늘하게 맑은 진실의 감각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길 위의 두 사람」글·그림 김미진


안녕하세요.

2011년 알라딘 서재에 장편소설 《랭보의 바람구두를 신다》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이곳에서 새로운 장편소설 《달의 몰락》을 연재하려 합니다.

《달의 몰락》은 결혼을 앞둔 여자와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히말라야 로체 남벽 등정을 준비하는 남자의 재회를 그린 장편소설입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남자와 현실의 삶을 선택한 여자는 다시 만나면서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과 욕망, 상처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사랑의 완성이나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본의 중력과 죽음의 충동, 삶의 의무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충돌하는 순간, 인간이 감행하는 단 한 번의 흔들림과 그 의미를 탐색합니다.

다음 회부터 본격적인 연재가 시작됩니다.

(null)

 

작가 소개

김미진

1995년 『세계문학』에 장편소설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 《그 여름 정거장》, 《자전거를 타는 여자》, 《우리는 호텔 캘리포니아로 간다》, 《랭보의 바람구두를 신다》, 소설집 《그녀는 안개와 함께 왔다》를 출간했다.

여행 에세이 《로마에서 길을 잃다》, 《히말라야, 눈부신 자유가 있는 곳》,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등을 펴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날, 오랜만에 맞는 봄바람이었다.
아파트 정원에 핀 벚꽃에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여의도 벚꽃길에는
온통 첫사랑 같은 하얀 꽃잎들이 날리고 있었다.



우연히 찍은 영상들을 용기 내어 유튜브 쇼츠에 올렸다.

다음 날은 남산공원으로 발걸음이 이어졌다.

오늘은 강남에 일이 있어 나왔다가
석촌호수에 잠시 들렀다.


햇빛은 맑았고,
호수 둘레는 벚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봄은 내 생에서 맞은 유일한 봄날이고,
나도 이 봄의 유일한 청춘이었네.


오늘 밤 비가 내리면,
그 빛도 가뭇없이 흩어지겠지.



(null)

나는 그 봄 한가운데,

잠시 멈춰 서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