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서윤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지붕 공사를 맡긴 설비 가게 주인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어제는 다른 현장 공사로 자리에 없었고, 오늘은 갑작스레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아버지는 공사비를 건네기 전에 반드시 가게 주인을 만나, 하자 보수에 관한 설명과 다른 유의 사항들을 꼼꼼히 챙기라고 누누이 당부하였다. 결국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려면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고, 설비 가게를 다시 찾아가려면 아무래도 자전거가 필요할 것 같았다.


‘큰할머니의 친한 이웃이었다잖아.’


연두색 털모자와 연두색 망토가 그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큰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에 수북하게 담겨 있던 털실과 뜨개바늘이 그녀의 마음을 잠시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럼… 누추하지만, 잠깐 들어오세요.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그를 돌아보았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전거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실내 공간은 그 안에 누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마련이다. 남자의 큰 키와 넓은 어깨 탓에, 집안은 갑자기 전보다 좁아 보였고 천장도 한결 낮아진 듯 느껴졌다.


그녀는 출입문 근처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술과 턱 주변에 붉게 벗겨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크지 않은 상처였지만, 그 흔적은 마음 어딘가에 생긴 작은 균열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자전거에서 떨어지며 쓸린 살갗은 불에 덴 듯 쓰라렸고, 턱 아래의 욱신거림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행히 입안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좀 어때요? 병원에 가야 할까요?


그가 불쑥 거울 속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하나의 거울 안에서 두 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엇갈리듯 급히 한발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 괜찮아요. 흉이 질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그녀는 무심한 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엌 수납장에서 구급함을 꺼내 후시딘 연고를 찾아 들었다. 손을 수돗물에 씻은 다음 면봉에 연고를 묻혀 부어오른 턱에 조심스레 펴 발랐다. 따갑고 쓰라린 느낌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피부 속 깊이 남은 뻐근한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속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그 사이 도준은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집 뒤쪽 창고로 가서 타이어 펌프와 펑크 수리 키트를 들고 돌아왔다. 길쭉한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패치 키트가 들어 있었다.


-이거면 될까요?

-네. 충분합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MTB 자전거는 작고 가벼운 장난감처럼 보였다. 자전거포 주인 못지않은 노련한 솜씨로, 두 개의 레버를 다루며 타이어를 벗기고 납작해진 튜브를 꺼냈다. 바람을 불어 넣은 튜브를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댄 그는, 숨소리를 죽인 채 공기가 새는 소리를 들었다.


-아하, 여기네요. 바로 이 구멍이에요. 보이죠?

-어디요?

 

그녀는 무릎을 굽혀 그의 손끝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익숙한 비누 향과 은은한 남자의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가슴이 불현듯 요동쳤다. 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본드를 바르고 조금 기다려야 해요.

-네?

-본드가 꾸덕꾸덕해져야 서로 잘 붙어요.

 

도준은 사포로 튜브 표면을 부드럽게 문질러 정리한 뒤, 키트에서 적당한 크기의 패치를 골라냈다. 길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접착제를 능숙하게 펴 바르는 그의 동작은 빠르고도 정확했다. 그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보는 동안, 서윤은 자신이 어느새 낯선 리듬 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몸은 아직 그 판단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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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나무들에 둘러싸인 별장 주위엔 늦은 오후의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도준은 마당 오른편, 후박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웠다. 뒷문을 열어 자전거를 꺼내는 동안, 서윤은 숨을 고르며 차에서 내렸다.


-고마웠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옮길게요.


그녀의 정중한 목소리에는 선을 긋는 듯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아, 그럼 이거 챙기세요.


펑크 난 앞바퀴를 그녀에게 건네며, 도준이 싱긋 웃었다.


-이건 제가 직접 배달할게요.


도준은 자전거를 번쩍 들어 어깨에 척 얹었다.


-얼른 앞장서세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앞바퀴를 들고 한발 먼저 별장 입구의 계단을 올라갔다.


-이 집엔 이제 사람이 안 산다고 고모부에게 들었어요. 가끔 필요할 때만 내려오신다고요.


앞서가는 그녀를 향해 도준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부모님 부탁으로 지붕 공사한 걸 확인하러 온 거예요.

-예전에 여기 사시던 분을 저도 잘 알아요.

-우리 큰할머니요?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느새 가까워지자, 도준은 멈칫 발을 멈추었다. 그는 서윤보다 머리 하나쯤 더 컸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깊고 조용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서윤의 가슴속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어릴 적에 저도 여기, 고모부 집에서 한동안 살았어요.


그가 비밀스러운 사연이라도 털어놓듯, 그녀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시선을 돌렸다.


-그… 그렇군요.

-그럼요. 그러니 우린 거의 이웃사촌인 셈이죠. 하하하.


그가 활짝 웃자, 검게 그을린 얼굴 위로 하얀 치아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서윤도 벙긋 웃으며 다시 돌아서 발을 내디뎠다.

 

길게 뻗은 돌층계를 오르는 동안, 그녀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큰할머니와 함께했던 옛 시절을 떠올렸다. 큰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에는 늘 다채로운 색실이 가득했다. 틈틈이 스웨터와 장갑을 떠 친척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를 즐기셨는데, 도준 역시 그 따뜻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고모 친구분이셨잖아요. 그때는 아직 젊으셔서 윗집 아줌마라고 불렀죠. 제게 곶감도 주시고 가래떡도 구워주셨어요. 연두색 털모자도 손수 떠주셨고요.

-어머, 저도 어렸을 때 큰할머니가 떠주신 연두색 망토를 입은 적 있어요.

-연두색 망토요?

-같은 연두색이면 같은 실로 짠 걸지도 모르겠네요. 참, 신기해요.

-고모가 담근 겨울 김장을 제가 여기까지 날라다 드리기도 했어요.

-어머나, 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오해할 뻔했어요.


서윤은 손끝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무슨 오해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그러셨잖아요. 처음 만난 여자한테.

-아, 죄송합니다.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근데 정말 그런 걸 믿으세요?

-아, 그거요? 하하하.


도준이 입을 크게 벌려 호탕하게 웃자,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소년 같은 웃음이 번졌다. 서윤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출입문 앞에 이르러, 서윤은 문 열쇠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잠시 멈춰 섰다. 온화하던 미소는 어느새 지워지고, 냉철한 현실 감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전거만 건네받고 그를 돌려보낼지, 아니면 집 안으로 들여 음료 한 잔이라도 내어놓을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큰할머니와 그의 고모부 집안 사이의 오랜 인연을 떠올린다 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여전히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별장까지 무사히 오긴 했지만, 정체도 분명치 않은 남자를, 그것도 그녀 혼자만 있는 집안에 발을 들이게 한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됐으니 그만 돌아가 달라 말하기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윤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전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타이어 펑크 패치 있나요? 바람 넣는 펌프도요.

-네? 아… 아마 창고에 있을 거예요.
-다행이군요. 한번 가져와 보세요. 금방 손봐 드릴게요.

 

자전거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그의 태도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서윤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말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도준의 눈빛은 여전히 확고했다.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대로 두고 가면, 계속 마음에 걸릴 것 같아요. 밑에 차도 안 보이던데, 자전거까지 없으면 많이 불편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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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차 안은 차체의 겉모습보다 훨씬 더 낡아, 오래된 유물처럼 빛이 바래져 있었다. 핸들은 손때가 겹겹이 스며든 가죽 위로 번들거렸고, 변속기 너머로는 세월이 남긴 자국이 부드럽게 패여 있었다. 이름 모를 시간이 묻어난 시트는, 옛이야기의 숨결인 듯 묘하게 따스함을 풍겼다. 자동차의 라디오는 침묵했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재즈의 잔향이 번져올 것만 같았다. 


서윤은 이 차가 오래도록 품어온 정서의 무게를 어렴풋이 감지했다. 어쩌면 이 차는 시간이 머물렀다 간 자리이자, 사라진 기억의 흔적들을 감싸안은 쉼터일지도 몰랐다.


-자, 출발합니다.


도준이 웃으며 말했다.


-네.


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숨을 삼켰다. 밀폐된 공간에서 낯선 남자와 단둘이 앉아 있다는 생각만으로 불안이 스며들었다. 차 안의 정적은 숨소리조차 울리는 듯 어색했고,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탔다는 사실이 자책처럼 가슴을 조여왔다.


강태일이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싸늘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경멸 어린 입술 위로 번지는 비웃음. 심지어 침이라도 내뱉을 듯한 그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도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운전대를 단단히 쥔 채 숲속 비포장길만 응시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여유롭고 안정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보는 그 모습은 얼마간 서윤을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를 의식하지 않는 거야… 근데 내가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자인가?’


서윤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런 유치한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무심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서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쩐지 궁금하고 자꾸 신경이 쓰였다.


서윤의 마음이 조금 진정될 무렵, 차가 크게 덜컹거리는 지점을 지나자 오솔길은 점점 좁아졌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보리암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이, 숲 그림자 속에서 한 가닥 흐릿한 실루엣처럼 드러났다.


-저기서 좌측으로 가시면 돼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그맣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위에 있는 파란 지붕 집이죠?


도준이 가볍게 웃었다.


-네?


서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 그렇죠, 참!


서윤은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도준이 핸들을 왼쪽으로 꺾자 엔진이 낮게 웅웅대더니, 랜드로버는 울창한 잡목 숲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른 실개천 같은 고랑을 지날 때는 차체가 더욱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도준이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지 않게 받쳐 주었다.


서윤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잡이를 붙잡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도준의 손이 다시 운전대로 돌아가자, 낯설고 무방비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며 손끝까지 번졌다. 차 안의 정적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계속 침묵만 지키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했다.


-굉장히 오래된 차네요.


서윤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놀란 듯 돌아보았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74년형이에요. 곧 폐차될 운명이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굴러가죠.


남자의 말투에는 담담함 속에 묘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대학교 때 이거랑 비슷한 차를 타고 다니던 교수님이 계셨어요.

-그 교수님 차도 이렇게 고물이었나 보죠?

-아니, 이 차가 고물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냥 농담한 거예요.

-아, 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반사되어 속눈썹 아래에 투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모습을 바라본 순간, 도준의 눈에도 기억의 잔상이 스쳤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가, 마치 신호를 받은 듯 서서히 깨어났다. 그녀는 작은 기척에도 놀라 금세 상처받을 것 같은 예민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촉촉한 눈빛은 작은 몸짓에도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도준은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일부러 꾹 참았다. 성급한 말 한마디로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용천 계곡에서 처음 만난 조그만 여자아이가 이렇게 성숙하게 자라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제 고무부 집 마당에서 홀로 서 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한 끌림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감된 재회처럼, 가슴 한가운데 작은 등불이 켜졌다. 그 짧은 순간, 지난 세월이 한 점으로 응축되며, 오랜 인연의 끈이 불쑥 당겨지는 듯했다.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접점 같았다. 험준한 봉우리와 절벽을 전전하며 살아온 도준의 세계와, 무르고 따스한 그녀의 세계가 초봄의 투명한 바람 속에서 잠시 포개졌다. 도준은 자신과 서윤이 이토록 오랜 세월 인연을 이어왔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는 매 순간 치열한 경험과 도전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왔고, 때로는 벼랑 끝에서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서윤은 그런 극단적인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부서질 듯 가냘프고 깨끗하며 순수한 분위기는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그녀만의 선명한 존재감이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흘러간 날들 속에서도 변치 않은 기억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불현듯, 서윤이라는 여인의 내면과 그녀가 지나온 계절들이 궁금했다. 마치 자신이 놓치고 살아온 어떤 빛의 조각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려 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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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도준이 조심스럽게 차를 옆으로 붙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전거에 문제라도 생겼나요?


나지막하면서도 묵직한 그의 목소리에 서윤은 움찔했다. 그녀는 자전거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옆을 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평소와 다르게 입술 끝이 살짝 떨리고,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방금 땅바닥과 씨름이라도 한 듯한 자신의 모습이 민망했고, 이런 쑥스러운 순간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인적 드문 외딴 숲길에서 생판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마주한 상황은 묘하게 꺼림칙했다. 전날에도 그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있던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그랬다. 울타리 하나 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야외 공간이지만, 이 깊은 숲 한가운데서 낯선 이와 다시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은연중에 간절히 빌고 있었다.


‘어서 가세요.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세요. 제발.’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야, 저 눈빛?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서윤은 바퀴가 터진 자전거를 억지로 끌며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지쳐 있었지만, 가능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균형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다시 차를 옆으로 붙였다.


-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뇨.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앗!


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턱에 난 상처가 소금을 뿌린 듯 화끈거리며 몹시 따가웠다.


-잠깐만요.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요.


남자가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자전거 타다가 넘어진 거예요?

-괜찮아요.


남자의 호의를 밀어내듯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긴요. 턱에 흙이 잔뜩 묻었어요. 우선 상처부터 좀 씻어내야겠네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계하는 빛이 어른거렸다.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로 가서 생수병과 휴대용 티슈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먼저 입안을 헹군 뒤, 그가 따라주는 물을 손바닥에 받아 턱 주변을 닦았다. 찬물이 상처를 스치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많이 쓰라려요?


도준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자전거 헬멧은 왜 안 쓰셨어요?


그의 목소리는 온화하지만 단호했다.


-여기 그런 데잖아요. 혼자 천천히 타는 건데… 굳이 그렇게 눈에 띄고 싶진 않아서요.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거북하게 울렸다. 자기 귀에도 낯설게 들리는 음성에, 순간 입안 어딘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닐지 불안이 치밀었다.


-혼자일수록 더 조심하셔야죠. 자전거 사고도 자동차 사고 못지않게 위험하거든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로요.


서윤은 손을 내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거절의 제스처는 분명했지만, 눈빛에 미세한 망설임이 어렴풋이 비쳤다. 도준은 시선을 옮겨 펑크 난 자전거 바퀴를 가리켰다.


-이걸 혼자 끌고 갈 수 있겠어요?

-뭐, 그냥…

-이런 길에, 혼자서요?

-아니, 그러니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고, 도와달라 하기엔 자존심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냥 가라고 하시면,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도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차로 향하는 걸음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 발씩 멀어지면서도, 그 뒷모습에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여유가 묻어났다.


-잠깐, 저기요!


서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쫓아갔다.


-도, 도와주는 김에 좀… 끝까지 부탁드릴게요.


조금 숨이 찬 말투였지만,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도준은 천천히 돌아섰다. 눈빛은 조금 전보다 깊어져 있었고,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떠올랐다.


-흠, 이 정도면 인연이네요. 먼저 자전거부터 실을게요.

-네? 어제는 운명이라더니, 오늘은 또 무슨 인연… 이에요?

-어제요?

-할아버지네 집 마당에서요.


도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아, 제가 잠깐 착각했나 봐요.


서윤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뭐… 그냥…


말끝이 흐려지자, 도준이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이라니요. 이런 것도 인연인데.


서로의 눈빛이 잠깐 맞닿았다. 긴장과 웃음, 약간의 부끄러움이 뒤섞인 순간이었다. 봄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숲길을 스치며,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을 흔들어 놓았다.


도준은 멋쩍게 웃으며 자전거 앞으로 다가갔다. 앞바퀴를 분리하는 그의 손놀림에는, 도구를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 특유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유아용 자전거라도 되는 양 가뿐히 들어 짐칸에 싣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자, 타세요.


서윤은 문득 멈칫했다. 도움을 받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탄다는 건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제 잠시 스쳤던 김 씨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의 불안이 되살아났다. 마음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본능적으로 어깨가 굳어졌다. 숲길 양옆을 살피며 되돌아설 길을 찾았지만,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남자, 그리고 고요한 숲만이 고립된 현실 속에 남아 있었다.


‘김 씨 할아버지 조카라잖아.’


그 순간, 우연히 찾아온 작은 일탈에 그녀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을 느꼈을까. 아니면 불안하기만 했던 걸까. 그 불안 너머에, 은근히 스며드는 설렘도 있었을까.


소리와 기척이 사라진 오후의 숲길에서, 서윤은 그의 부축에 살짝 기대어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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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서윤이 자전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뉴욕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뉴저지 포트 리의 작은 가게 위층 원룸에서 지내며, 혼잡한 버스 대신 자전거로 맨해튼까지 통학했다. 거의 1년 가까이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허드슨강의 바람을 맞으며 질주했던 그 경험은 몸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제는 횡계의 숲길 정도는 무리 없이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2차선 차도를 따라 달리던 서윤은 인가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덜컹거리는 길 위로 엷은 햇살이 부서졌다. 사람의 발길마저 드문 구불구불한 길 끝에는 완만한 내리막이 펼쳐져 있었다.


서윤은 속도를 줄이고 페달을 수평으로 맞춘 뒤,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자전거가 울퉁불퉁한 지면 위를 내달릴 때마다 짧고 날카로운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앞바퀴는 자갈에 부딪힐 때마다 불규칙하게 튕겼지만, 서윤은 핸들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았다. 경사가 가팔라지자 뒤꿈치에 힘을 주어 페달을 깊이 밟으며 속도를 조절했다.


-좋아, 이 정도는 문제없어. 근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오늘은 손문기 선생님 전시회 오프닝이 있는 날이었다. 손 화실 식구들이 리온 갤러리에 와서 자신을 찾을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속상했다.


-괜찮아. 전시회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리며 핸들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길 한가운데 돌덩이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까만 암석의 날선 면이 햇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지만, 앞바퀴가 돌무더기를 스치며 중심을 잃었다. 자전거는 미끄러지듯 흔들렸고, 한순간 휘청거리며 그대로 무너졌다.


-앗!


짧은 비명이 터진 순간, 그녀의 몸이 자전거와 함께 튕겨 올랐다. 중력에서 풀려난 듯 허공에 매달린 채, 손은 핸들에서 빠져나갔고, 두 발은 페달을 벗어나 공중에서 엇갈렸다. 곧이어 닥칠 충돌을 직감한 가슴이 차가운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자전거와 함께 럭비공처럼 날아가 땅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얼굴부터 처박히는 충격과 함께 거친 흙이 입과 콧속 깊숙이 밀려들었고, 흙먼지와 뒤섞인 비명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두 다리는 자전거 바퀴에 꼬여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으, 으으…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얼굴 한쪽에 강펀치를 맞은 듯한 예리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입안에서는 마른 흙이 서걱거렸고, 귀에는 ‘찌잉’ 하는 이명이 울렸다. 머릿속은 쇠망치에 찍힌 듯 멍하고, 시야는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혼자 당한 일이니 그다지 창피할 일은 없었지만, 곧바로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갑자기 싸늘한 예감과 함께 울음이 치밀어 오를 듯했다.


-아냐. 괜찮을 거야. 정신 차리자.


땅바닥에 그대로 엎어진 채, 그녀는 충격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뼈마디 곳곳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욱신거렸고, 손끝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혀끝에 와닿은 흙의 거친 감촉이 메스꺼운 불쾌감을 더했다. 그녀는 힘겹게 엉킨 다리를 풀기 시작했다. 흙먼지를 퉤 뱉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더듬자 오른쪽 뺨 아래가 울퉁불퉁 부어 있었고, 턱 밑은 쓰라렸다. 팔뚝과 무릎에서는 화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왔고, 피부가 벗겨진 다리 상처에서도 붉은 열기가 느껴졌다. 손바닥에도 둔한 통증이 남아있었으나, 장갑 덕분에 깊은 상처는 피한 듯했다.


-많이 안 다쳤어. 부러진 데도 없잖아.


서윤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몸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는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앞바퀴가 터진 자전거는 만취한 취객처럼 무겁게 비틀거릴 뿐이었다. 멀쩡하게 잘 달리던 타이어를 찢은 범인은 바로 그 녹슨 못이었다. 오랜 세월 벌겋게 산화한 뾰족한 쇳조각 하나가, 하필 그 순간 누군가가 걸려들기를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 기능을 잃어버린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이 들었다. 가뜩이나 험한 비포장도로에서 질질 끌리며 휘청대는 앞바퀴 때문에 몇 걸음 옮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겨우 비틀비틀 걷고 있던 그때, 갑자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게 우연은… 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그가 더듬거리며 내뱉었던 그 말을 서윤은 또렷이 기억했다. 처음 본 남자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운명’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놀란 새가슴이 되어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하필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마주치다니.


-맙소사, 왜 이럴 때 나타난 거야.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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