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잠시, 거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약혼식을 치른 지는 오래됐지만, 신랑 측에선 여태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서윤의 가족들은 혹시 혼사가 엎어지는 건 아닌지, 숨죽이며 눈치만 살폈다.
태일의 집안에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길 기대하던 오빠 내외에게는, 이런 무기력한 기다림이 복장이 터질 만큼 갑갑했다. 근래 들어 서윤과 태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것을 가족 모두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는 중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결혼 날짜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는 어색함과 불안이 교차하는 얼굴로 서윤을 바라보다가, 이내 현실을 받아들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이 나이만 자꾸 먹어가는데, 결혼 얘기는 영 뜸해서 나도 좀 걱정은 했지. 이왕 할 거면 올해 안에, 사돈댁 큰 행사 전에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우리 아가씨, 좋겠다! 드디어 결혼 날짜를 잡게 됐어요. 웨딩드레스 입으면 너무 예뻐서, 사람들 다 기절하겠는걸요?
올케는 서윤 옆에 놓인 샤넬 백을 슬며시 쓰다듬으며,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결혼이라니요?
서윤은 놀라움과 당혹이 섞인 눈으로 태일을 바라보았다. 태일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어이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 왜 그래? 나 상처받게.
-상처를 받아요? 누가요? 허, 아무런 상의도 없이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갑자기라니? 약혼 다음엔 당연히 결혼 아닌가? 약혼 오래 끌면 좋지 않다고, 자기가 말했잖아.
-제가요? 언제요?
-그래, 갑자기는 아니지. 서윤아, 이건 애초에 질질 끌 일이 아니었어. 벌써 결혼하고도 남았겠다.
오빠가 정색한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맞아요, 맞아. 더 늦기 전에 결혼해서 애도 낳아야지요.
올케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윤이, 네 생각은 어떤데?
머리를 콕콕 쑤시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오늘, 태일이 예고도 없이 이 집에 쳐들어온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가족들을 선동하려는 속셈. 손쉽게 가질 수 없는 장난감을 끝내 소유하려는 집착. 그는 지금, 치밀하게 설계된 전쟁을 즐기고 있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대신, 남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지켜보려는 것이다. 서윤은 자신이 이미 포획된 먹잇감임을 또렷하게 인식했다.
-제가 형님 일하실 자리도 한번 알아보라 했어요. 이제 곧 한 식구잖아요.
-어머, 고마워. 강 서방, 아니 매제님!
오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이라도 출 듯했고, 올케는 눈가를 훔치며 금세 눈물이라도 찍어낼 기색이었다.
-자,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 한 잔씩 더 해야지.
오빠가 술주전자를 번쩍 들더니 태일의 잔에 막걸리를 콸콸 부었다. 올케는 잽싸게 부엌으로 달려가 안주 몇 가지를 더 챙겨왔다. 집안은 어느새 잔칫집처럼 들떠 있었고, 서로를 추켜세우는 말의 성찬이 쉼 없이 오갔다. 단 한 사람, 서윤만이 그 환호 속에서 창백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태일이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장인어른이 될 사람에게 은퇴 후의 소일거리를 슬쩍 제안했고, 이어지는 말들로 가족 모두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퇴직 후 계속 집에만 계시는 것보다, 가볍게 몸을 움직이실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운동 삼아 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버님, 어머님 모두 강남 쪽 아파트로 옮기시는 건 어떠세요? 교통도 편하고, 서윤 씨와 오가기도 훨씬 수월하실 거예요. 이 집은 오래되어 겨울에 추우실까 봐 걱정도 되고… 어머님께서 편찮으시면 간병인을 따로 붙여드릴 수 있어요. 어머님 병원에 다니실 때도 곁에 누군가 있는 게 훨씬 편하시잖아요. 서윤 씨를 제가 데려가면 형수님 혼자 모든 걸 감당하시기 어려우실 것 같아서요.
태일의 말에 올케가 감격한 얼굴로 코를 훌쩍거렸다.
-강남 아파트에 간병인까지… 어쩌면 좋아요. 너무 감사해서… 뭐라 말을 못 하겠어요.
태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직원들에게 준비시킨 선물 보따리 중 하나를 손끝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 올케에게 내밀었다.
-약혼식 때 뵙고부터, 이게 형수님께 정말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탈리아에서 직배송된 겁니다.
-네? 이게 뭐예요?
-풀어보세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잖아요. 제 마음입니다.
-세상에나, 말씀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세요… 근데, 뭐지? 왜 이렇게 내 가슴이 뛰는 거지?
-어서 열어봐, 여보.
올케가 포장지를 풀어 상자를 열자, 화려한 레이디 디올 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억!’ 숨을 들이켠 그녀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치다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것은 태일이 장착하고 온 무기 중, 가장 정밀하게 조율된 ‘효율성 100%’의 맞춤형 비밀 병기였다. 거대 자본주의가 만든 이데올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모든 여자가 명품 앞에서 어김없이 무너질 거라 믿는 걸까. 서윤은 옆에 놓인 샤넬 백을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가족들은 저마다 기막힌 미래와 달콤한 환상에 휩싸인 채, 조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했다. 그러나 서윤은 절벽 끝에서 홀로 허공을 버티는 기분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마치 흰색 수의를 걸치고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감각은 점점 선명해졌고, 문득 오늘 낮 친구 결혼식장에서 꿈에 본 장면이 떠올랐다.
다가올 현실의 전조처럼, 타는 듯 내리쬐는 햇살 아래 사막 같은 벌판 위를 누더기처럼 찢긴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눈물에 젖은 얼굴로 끝없이 걷고 있었다.
그 장면이 되살아나는 순간, 서윤은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누르려 했으나, 덫에 걸린 짐승처럼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제발 그만해!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