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서윤은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태일 옆 빈자리에 앉았다.


-엄마는요?

-컨디션이 안 좋아 일찍 누웠어.


아버지가 태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안방에서는 작은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얼마 전 정원 텃밭에서 크게 넘어져 병원에 입원한 뒤, 퇴원 직후부터 인지 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물건을 자주 놓치거나 말을 잇지 못하고, 낯선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아직은 식구들만이 알고 있는 불안한 상태였다.


-어디가 많이 편찮으세요?


태일이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렇지, 뭐. 나이에 장사 있나.


아버지가 대답했다.


-매제님, 걱정 마세요. 곧 좋아지실 거예요.


오빠가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거실은 평소보다 한결 정돈된 모습이었다. 가족들이 갑작스러운 손님맞이에 분주히 움직이며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대충 치운 흔적이 역력했다. 엄마 역시 재빨리 숨겨야 할 물건들처럼 다른 공간으로 옮겨진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가씨, 잠깐만요.


올케가 부엌으로 급히 가더니, 쟁반 위에 밥공기와 국대접, 숟가락을 챙겨 돌아왔다.


태일의 밥그릇은 거의 비어 있었고, 국그릇도 깔끔히 비워진 상태였다. 언제 어디서나 최고급 음식만 찾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서윤은 어쩐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웃음과 행동 하나까지도 모두 계산된 설정처럼 느껴졌다.


오빠는 취한 중에도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두 남자가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함께한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오빠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추려는 듯 술잔을 다시 권하며 덕담인지 아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을 늘어놓았다.


오빠의 설명 속에서 태일은 생각보다 성격이 원만하고 입맛도 까다롭지 않으며, 호남형 외모에 인간미까지 갖춘 요즘 보기 드문 진짜배기 남자였다. 올케 역시 부잣집 도련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인지, 평소와 달리 상냥하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달콤한 아첨을 이어갔다.


-언제 봐도 참 멋지세요, 호호호. 성격도 아주 훌륭하시고… 그런데 저희 반찬이 너무 소박했죠? 오늘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시장에라도 다녀왔을 텐데요.


손끝으로 입가를 가린 채, 순박한 시골 아낙처럼 ‘호호’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나 말이다. 서윤아, 너 오늘 강 서방 오는 거 몰랐니?


아버지가 물었다.


-몰랐어요.

-저는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특히 시금치 된장국이 참 맛있네요. 밥은 역시 집밥이 최고죠,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허.


태일은 크게 웃으며 유들유들한 태도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서윤을 흘끗 보는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자신의 소유물을 훑어보듯 서윤의 얼굴과 몸, 표정과 기색을 한꺼번에 스캔했다.


-요새 많이 바쁜가 보네? 연락이 뜸했잖아.


태일은 그녀를 떠보듯 상냥한 어조로 말을 던졌다.


서윤은 굳은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도준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태일과는 의도적으로 냉정한 거리를 두었다. 성북동 집안 행사에 두 차례 불려 간 일과 갑자기 찾아온 그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눈 일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접촉을 차단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는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서울 서쪽 끄트머리 그녀의 집까지 들이닥쳤다. 바리바리 싸 온 선물 보따리들은 명분을 가장한 무기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꺼내 들 수 있는 카드가 수없이 남아 있었다.


서윤은 출구가 봉쇄된 막다른 골목 앞에 서 있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태일은 원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기 것이 될 수 없다면, 아예 부숴버리거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런 남자가, 하필 이 밤에 이 집 거실에 앉아 있다니.


-이번 가을에 저희 집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습니다. 왕고모님 구순 축하연인데, 외국에 나가 있는 친척들까지 모두 모이는 자리예요. 저희 집안은 보수적이라 어른들이 계실 때 곁에 맏며느리가 있어야 한다고, 결혼 날짜를 서두르라 하십니다. 아시잖아요. 제 아버님이 서윤 씨를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신우건설’ 창립자이자 이사회 고문인 강문태는 단 한 번도 서윤에게 따뜻한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집안이 변변찮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라 여겼고, 노골적인 무시와 조롱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가 결혼을 서두르라 했다니.


서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여기엔 분명, 태일의 또 다른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최근 서윤의 변화와 일탈의 기미를 감지한 그는 태세 전환을 위해 교묘하게 상황을 틀어쥐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질서를 새로운 틀 속에 욱여넣으려는 술책. 그건 분노나 불안에서 비롯된 충동적 선택이라기보다, 철저히 계산된 통제 본능에 가까웠다. 그에게 약혼녀란 단순한 애착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감정을 논리로 조율했고, 여전히 서윤의 운명을 손바닥 위 공깃돌처럼 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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