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7월 중순, 대학 동기 은영의 청첩장이 도착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친구들 중 누군가는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그녀 역시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하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결혼식 날, 예식장은 고풍스러운 예배당을 흉내 낸 듯 꾸며져 있었다. 신랑과 신부 측 하객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빽빽했다. 신부 대기실에서 마주한 친구는 평소의 청바지 차림 대신에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순백의 수국 부케를 든 채 환하게 웃으며 앉아 있었다.


-오늘 정말 예쁘다.

-잘 살아. 행복해야 해.


친구들은 정해진 대사처럼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고, 차례차례 기념사진을 남겼다. 아르누보 양식의 엔틱 소파에 앉은 은영 옆으로, 곁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만 계속 바뀌었다. 초복이 지난 한여름 날씨가 찌는 듯 무더웠다. 모처럼 정장 차림에 풀 메이크업까지 한 친구들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웨딩홀까지 오려면, 지하철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누군가 투덜거렸다. 하필 이렇게 더운 날, 그것도 주중에 결혼 날짜를 잡은 이유가 뭐냐고. 새신랑의 해외 파견 일정 때문이라는 설명에 불평은 이내 잦아들었다. 늘 그렇듯, 이런 행사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성품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서윤은 자리에 앉아 깜빡 졸고 말았다. 한순간, 백일몽 같은 섬뜩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황량한 모래벌판 위, 누더기처럼 해진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눈물을 흘리며 끝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은 먼지와 피에 엉겨 붙어 무겁게 끌렸고, 발걸음을 멈출 때마다 하얀 천 위에 붉은 얼룩이 더해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계속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여자는 태양 아래 서서히 말라붙는 그림자처럼 모래벌판을 쫓기듯 가로질렀다.


서윤은 진저리를 치듯 몸을 떨며 그 꿈에서 깨어났다. 남의 성스러운 예식 중에 그런 몹쓸 꿈을 꾸다니. 왠지 모를 불길함으로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때 옆에 앉은 친구가 살며시 손등을 톡 건드렸다.


-주례사는 짧을수록 좋은데. 나도 너무 졸려.

-어머, 혹시 내가 코 골았니?

-그럴 리가. 요즘 갤러리 일이 많이 바빴나 봐.

-응. 좀 그랬지.


서윤은 잔 하품을 삼키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샤넬 백이 놓여 있었다. 지난봄 수경이 사준 바로 그 백이었다. 번쩍거리는 체인 줄이 누군가의 비웃음처럼 유독 신경이 쓰였다. 옆자리 친구의 시선이 은근히 그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 가방은 갤러리 사물함에 처박힌 뒤 단 한 번도 세상 구경을 한 적이 없었다.

오늘 아침, 서윤은 캔버스 천으로 된 손때 묻은 가방을 메고 출근했다. 오전 근무 도중 친구 결혼식이 갑자기 떠올랐다. 집에서 입고 나온 옷차림이 너무 소박해 보였다. 식장에 가려면, 작은 포인트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사물함을 열어 하드 케이스 속 그 가방을 꺼냈다.


옆자리 친구의 시선이 또 한 번 그녀의 무릎 위를 스쳤다. ‘그냥 수수하게 캔버스 백을 메고 올 걸’ 새삼스러운 후회가 밀려왔다. 이런 자리에서 서로를 향한 눈초리에는 탐색에 가까운 예리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모처럼 만난 친구는 그녀의 명품백 너머에 숨어 있는 어떤 기류 변화를 읽어내려 하는 듯했다.


서윤이 약혼식을 치렀다는 소식은 이미 친구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상대가 ‘신우건설’ 후계자라는 사실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서윤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관심의 중심에 서는 쪽이 아니었다. 칭찬이든 질시든, 결국 타인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었다. 그녀는 변덕스러운 소문에 흔들리기보다,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주례 선생의 느릿한 음성이 서서히 멀어지고, 석담리 산중 호숫가의 바람과 그날의 꽃잎들, 그리고 도준의 목소리가 아득히 되살아났다.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건 뭔가요?


그 익숙한 물음이 이번에는 더없이 절실한 인생의 화두로 다가왔다. 주입된 선택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삶이란 무엇일까. 도준과의 만남 이후, 그녀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자신만의 삶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거의 매일 소식을 주고받았다. 틈틈이 짧은 시간이라도 마주 앉았다. 태일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인사동 근처의 카페, 한적한 공원, 오래된 궁궐의 연못가에서 함께 있었다. 그 시간들은 삭막한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은밀한 안식처였다. 같이 차를 마시고, 식사하고, 영화를 보는 시간도 늘어났다. 서서히 그의 존재는 그녀의 하루 속에 잔잔히 흐르는 맥박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도준은 더 이상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는 기억 속 그림자가 아닌, 지금 그녀와 함께 호흡하는 존재였다. 두 사람의 걸음마다 연한 온기의 빛이 번졌다. 그 빛은 거리의 창가와 벤치, 가로수 이파리 끝에도 닿아 있었다. 가끔 피치 못한 일로 태일과 마주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 만남은 그녀가 피하고 싶은 긴장과 부담으로 가득 찬, 어쩔 수 없는 의례적인 자리였다. 그 외에는 연락을 피했고, 가능한 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도준과의 만남이 언제나 평온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종종 그녀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도준에게는 아직 가벼운 입맞춤조차 쉽게 기대할 수 없었다. 더 깊은 친밀과 애정을 꿈꾸는 것은, 도준과 태일, 두 남자를 동시에 배신하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 남자를 배반한 여자가 또 다른 남자에게 믿음을 줄 자격이 있을까.’


자의식을 찌르는 질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자주 되살아났다. 서윤은 가급적 빨리 태일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 문제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풀어갈 수 있는가였다.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보는 동안, 그녀의 시계는 어느새 한 사람, 도준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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