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낮은 물결 위로 일렁이는 빛이 도준의 얼굴에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을 드리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에 놓아둔 아이스박스를 들고 왔다. 군데군데 흠집이 난 누런 플라스틱 박스는 세월의 껍질을 뒤집어쓴 골동품처럼 보였다. 도준은 박스를 열고 깊숙이 손을 넣더니 두 손바닥을 포갠 듯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오래전부터 소중히 간직해온 분홍색 샌들 한 짝이 모습을 드러냈다. 횡계 용천 계곡에서 일곱 살 서윤이 잃어버렸던 바로 그 신발이었다.


시간의 물살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가슴에 스며든 선명한 고요 속에서 서윤은 어린 날의 자신과 마주했다. 차가운 계곡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몸, 허공을 향해 퍼덕이던 작고 가느다란 팔. 그리고 도준이 뛰어들어, 그녀의 몸을 힘껏 끌어올리던 순간. 도준은 열세 살 소년이던 그날을 묘사하듯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서윤의 눈동자가 몹시 놀란 듯 흔들렸다. 두려움이 번져가는 눈빛 속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희미한 영상 하나가 스치듯 깨어났다. 누군가 애타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얼굴 없는 형체가 엷은 막 저쪽에서 자신의 몸을 흔들었다.


-제가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거네요. 그때 죽었다면 지금 저는 여기에 없는 건가요? 그런데… 전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주 어렸을 때니까요. 충격이 너무 커서 스스로 기억을 차단한 걸지도 모르죠.

-맙소사… 기억을 지운 대가로 같은 악몽을 계속 꿨다는 거예요?

-아마도요. 이제 더는 물에 빠질 일 없어요.

-기억이 없다면, 그때의 저는 뭐죠? 그때 일을 알았다고, 물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서윤은 겁에 질린 시선으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어둡고 탁한 수면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깊고 거대한 초록빛 무의식의 저장고처럼, 모든 기억과 불안을 품고 있는 듯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어요. 누구도 죽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거죠.

-정말요? 그 말, 진짜 장담할 수 있는 거예요?

-물론이죠. 우리는 매일 살기 위해 태어났고, 돌아오지 않는 이 순간을 살고 있을 뿐이에요. 죽음은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있어요. 그 순간은 평생 단 한 번뿐인 거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오래전부터 준비된 확신과 다시 찾아온 기회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 물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이십이 년 전처럼, 지금도 내가 곁에 있으니.


그때, 호숫가 언저리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고요를 깨우듯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결에 하얀 꽃잎이 나부끼며 우수수 쏟아졌다. 반짝이는 수면 위로 흩어지던 그 잎새들 사이로 오래된 기억 하나가 오후 한낮의 적요처럼 너울거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넓고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손등을 감싸며 한 줄기 설렘처럼 가슴 깊숙이 번져왔다. 서윤은 시선을 떨구었다. 그가 천천히, 열망과 망설임이 서린 눈빛으로 다가왔다. 한순간 주저하는 듯 멈칫하더니,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받쳐 들었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촉촉한 입술에 닿았다. 한여름 뜨거운 열풍 같은 숨결이 서로의 입가에 겹치며 한데 뒤엉켰다.


서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호수의 물결이 은밀하게 꿈틀거렸다. 빛을 머금은 잔물결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일고, 어둡고 신비로운 수면 깊은 곳에서 느릿하게 헤엄치는 그림자 하나가 떠올랐다. 두 사람의 숨결과 심장이 물속에서 부드럽게 맞물린 듯했다. 물비늘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반짝이며 퍼져나갔고, 호수 전체가 환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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