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가파른 언덕을 힘차게 올라가던 랜드로버가 잠시 멈춰 섰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드넓은 호수가 아스라이 펼쳐졌다. 녹색 수면 위로 산그림자가 은은하게 드리워졌고, 반짝이는 햇살에 잔물결이 일렁였다. 두 사람은 홀린 듯 경이로운 호숫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 호수가 있었다니, 정말 놀라워요.
서윤의 입에서 조용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는 바닷가보다 여기가 더 좋습니다.
-저도요. 파도를 보면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요.
-여긴 괜찮은가요?
-도준 씨가 곁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요.
도준이 차에서 내려 짐칸 문을 열었다. 낚시 도구와 다른 장비들을 꺼내는 손끝이 바빠졌다. 서윤도 옆으로 다가가 눈치껏 손을 보탰다. 낚싯대, 접이식 의자, 보온병, 다양한 낚시 도구들, 그리고 간식거리와 낚시용 미끼가 담긴 누런색 아이스박스. 그들의 손길이 닿은 물건 하나하나가 소박한 여정의 짐처럼 하나둘 쌓여갔다.
그는 바닥에 놓인 찌낚시 도구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낚시를 하려면 자리를 잘 골라야 합니다. 물고기가 입질하는 자리가 따로 있거든요. 며칠 전에도 밤새 꿈쩍하지 않더니, 해 뜰 무렵에 두 마리를 연달아 낚았죠. 그것도 제법 큰 녀석들이었어요.
그는 오른팔을 번쩍 들어, 팔뚝만 한 붕어를 보여주듯 주먹을 쥔 채 팔꿈치를 가리켰다.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서윤의 머릿속에 커다란 은빛 붕어 한 마리가 떠올랐다. 낚싯대 끝에 매달린 채 꼬리를 푸드덕거리며, 물을 뚝뚝 떨구는 모습. 햇빛에 번쩍이는 비늘의 광채까지 선명했다.
-그렇군요. 정말 기다린 보람이 있었겠네요.
서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은 잠시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굴참나무 가지가 늘어진 물가를 가리켰다.
-그때 저기서 잡았죠. 바로 저기요.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준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이거 참… 좋은 자리를 선점당했네요. 어쩔 수 없죠. 우린 저쪽으로 가요.
그는 턱짓으로 물가에 고정해 놓은 길쭉한 낚시 좌대를 가리켰다. 서윤은 그 위에서 낚시를 하자는 뜻인가 싶어 잠시 망설였다.
-저긴… 좀 무서울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말아요. 뒤쪽으로 떨어져 앉으면 괜찮아요.
도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발을 내디뎠다. 서윤은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두 사람은 잡목이 쓰러져 있는 가파른 둔덕을 서로 부축하며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바스락거리는 낙엽과 흙냄새. 하늘거리는 바람결이 피부를 스쳤다. 호숫가에 이르러 도준은 낚시 좌대에서 한참 물러난 위치에 접이식 의자 두 개를 펼쳤다. 서윤이 자리에 앉자, 도준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무섭지 않아요? 의자를 좀 더 뒤로 뺄까요?
-아뇨, 괜찮아요. 저 나무판 위에만 안 올라가면 아무 문제 없어요.
-우린 여기 있으면 돼요. 시선을 멀리 두면 물결 때문에 어지럽지도 않을 거예요.
-네, 그렇게 할게요.
도준은 잠시 바람의 흐름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좀 차네요. 이걸 걸치세요.
그는 겉에 입고 있던 회색 폴로 셔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녀를 넉넉히 감싼 셔츠에는 그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 한 남자의 냄새가 이렇게 따뜻하고 진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서윤은 그의 품에 안긴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과 물 냄새, 그리고 그의 체취가 뒤섞인 공간 속에서 조용한 설렘과 묘한 용기가 그녀 안에 서서히 피어났다.
도준은 능숙하고도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물가에 두 대의 낚싯대를 설치했다. 삼단 낚싯대를 길게 펼친 뒤, 찌를 꿰고 추와 바늘을 매달았다. 손목의 탄력을 이용해 낚싯대를 가볍게 휘두르자, 낚싯줄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수면을 향해 날아갔다. 곧 물 위로 작은 수포가 피어올랐고, 둥근 파문이 번져나갔다. 삼색 줄무늬 찌가 또렷이 중심을 잡았다.
낚싯대를 지지대에 걸쳐 놓은 도준은 서윤 곁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바람 한 줄기가 스쳐 가며,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에 가까운 평온이 내려앉았다. 서윤은 연녹색 빛을 머금은 수면을 바라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도준은 낚싯줄을 드리운 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차오른다고 했다.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순간엔 아무 생각도 못 해요. 놀이기구를 타고 떨어질 때처럼 몸이 붕 뜬 감각이 계속되죠. 그런 데 있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면, 일상이 다 시시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점점 더 높은 곳, 더 위험한 길을 찾게 되는 건지도 몰라요. 마약 환자가 점점 강한 자극을 찾듯이요.
도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낚싯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낚시가 필요한 거죠.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에요. 찌만 바라보며 그냥 있다가 보면, 마음속 감정이 가라앉아요.
서윤은 그의 말을 하나씩 따라가며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보았다. 수직의 절벽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그의 모습, 그리고 지금처럼 고요한 물가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 그 두 개의 형상은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하나는 삶의 모든 것을 건 극한의 순간이고, 또 하나는 그 긴장을 비워내는 고요한 수행이었다. 둘 다 마음의 방향을 멈추고, 오로지 한 점에 몰입해야만 닿을 수 있는 자리. 무념무상의 틈에서 본질을 붙잡으려면, 그만큼 깊은 정신적 수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남자는, 그런 방식으로 자기만의 윤리와 생을 일관되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