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랜드로버를 보자 서윤의 콧등이 시큰했다. 지난봄, 횡계 숲길에서 그와 헤어지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태일의 BMW가 그녀를 태운 채 도준의 랜드로버를 스쳐 지나갔던 그날 이후, 얼마나 많은 날들을 혼자 애태우며 견뎌왔던가. 오늘 다시 그의 차에 올라타려니 어색함 속에 잔잔한 위로가 밀려왔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차 안, 기름 냄새가 낯설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안정감을 주었다. 밀폐된 공간에 대한 저항감도 일지 않았다. 태일의 BMW가 강요하던 차가운 압박감과 달랐다.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가 품은 따스한 온기, 그 안에 몸을 기대는 순간 편안함이 스며들었다.


오랜 기억의 무게보다, 한순간 사고처럼 밀려온 친밀감이 더 강력했다. 3일간의 운명 같았던 만남. 단 한 번의 키스가 이른 봄날의 화양연화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그 떨림 하나로, 지난 시간 전체가 송두리째 뒤집혔다. 기억이 몸속에서 부서지고, 심장이 울렸다. 횡계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우연처럼 다가온 남자가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 곁에 앉아 있었다. 그를 눈앞에 두고도, 현실 속 꿈처럼 아득했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서울에서도 자전거를 타나요?

-가끔 한강 고수부지에서요.

-헬멧은 꼭 쓰는 거죠?

-또 넘어질까 봐요?

-자전거 사고가 의외로 많아요. 다치면 큰일이잖아요.


서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이 빙그레 웃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녀는 기어 레버를 움직이는 그의 크고 두툼한 손을 바라보았다. 횡계 별장에서 자신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당기던 바로 그 손이었다. 손끝의 감촉이 은밀한 환영처럼 살갗을 스치고, 숨결이 닿을 듯한 상상에 온몸이 조용히 전율했다. 그의 뜨거운 손길이 다시 다가온다면,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손끝이 닿는 순간, 혹은 그 손이 다가오는 그 짧은 틈.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 어디에 가는 건가요?

-화성이요. 석담리 근처 낚시터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요. 혹시 피곤하면 잠깐 눈 붙이셔도 됩니다.

-아뇨, 괜찮아요. 전혀 피곤하지 않은걸요.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과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도준이라는 남자가 불러일으킨 봄바람이었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그녀는 전혀 다른 여자가 된 듯했다. 현실과 단절된, 오직 그들만의 세상. 그녀는 모든 걱정을 잊고 싶었다. 단지 오늘, 이 하루만큼은. 그와 함께 존재하기 위해.


얼마 후, 서서울 요금소를 빠져나온 랜드로버는 안산 분기점에서 안중 방면으로 핸들을 틀었다. 서해안 도로를 따라 석담리에 가까워지자, 흑갈색 곰솔 군락지와 해수욕장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출렁이는 물결 위, 푸른빛 하늘가에 초승달 모양의 낮달이 나지막이 걸려 있었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 한쪽에서는 낚시꾼들이 긴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묵묵히 바다를 응시했다. 가느다란 엿가락처럼 뻗어 오르는 해송 숲과 방풍림 사이로, 한가로이 주말을 즐기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가요?

-아뇨, 우리가 갈 곳은 따로 있어요.


랜드로버는 석담유원지를 지나며 속도를 올리더니, 어느새 경사가 급하고 인적이 드문 샛길로 접어들었다. 창밖으로 스쳐 가던 바다가 점점 멀어지고, 주변은 온통 숲과 흙냄새, 바람의 숨결로 채워졌다.


-이제부터 좀 더 빨리 달릴 생각이에요. 이런 길은 천천히 가나 빠르게 가나 덜컹거리긴 마찬가지예요. 괜찮으시겠어요?

-좋아요. 맘대로 하세요.


도준은 기어를 변속하며 핸들을 꺾었다. 엔진이 으르렁거리며 깊은 숲으로 달려들었다.


산길은 더욱 험해지고, 자갈이 튀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랜드로버는 굽이진 언덕길을 힘차게 올랐다. 그녀는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차체의 움직임에 따라 튀어 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안보다 먼저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틀 안에서만 살아온 삶이 이 대지의 진동 속에서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처음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고,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바람과 흙, 나무 냄새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창문을 끝까지 열자,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리듯 휘몰아쳤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날리도록 내버려두었다.


-무섭지 않아요?


도준이 외치듯 묻자, 그녀도 소리치듯 답했다.


-아뇨. 안 무서워요!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성숙을 위해 껍질을 벗는 게처럼 버거웠던 인생의 꺼풀 하나를 벗어내고 있었다. 어떤 낯선 용기, 아니 본능 같은 것이 몸속에서 꿈틀대었다. 더는 어제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예감이, 기분 좋은 두려움처럼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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