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도로 위, 차들은 한낮의 강물처럼 느릿하게 흘러갔다. 차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대시보드 위에 청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동을 걸자 라디오에서 익숙한 기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는 나지막이 음률을 따라 흥얼거리며 신사역 쪽으로 차를 몰았다. 브로드웨이 극장 건너편, 카페 아르테가 오늘의 약속 장소였다. 유리창 너머 사람들을 스치듯 훑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 뒤에 차를 세운 그는 꽃다발을 손에 쥔 채 카페 안으로 발을 옮겼다.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자, 미소년처럼 생긴 종업원이 다가왔다. 도준은 스파클링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스피커에서 카디건스의 ‘러브풀’이 끝나고, 새비지 가든의 ‘트룰리 매들리 딥리’가 흘러나왔다. 종업원이 가져온 레모네이드로 목을 축이려는 순간, 카페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서윤이 내렸다. 도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다시 앉았다. 손바닥으로 턱선을 가볍게 훑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운전사에게 몇 마디를 건넨 뒤 차 문을 닫고 카페를 향해 다가왔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옷자락이 몸의 곡선을 따라 우아하게 일렁거렸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차림에 손에는 눈부시게 하얀 린넨 가디건을 들고 있었다. 긴 머리는 하나로 느슨하게 땋아 내렸고, 어깨에는 커다란 왕골 숄더백이 무심히 걸려 있었다.


그녀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요!


도준이 손을 번쩍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어린 소녀의 무의식적인 행동 같았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며 그의 가슴이 사르르 떨렸다.


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의 감각이 하나씩 열렸다. 몸과 마음이 오로지 그 순간에 사로잡히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느려졌다. 그녀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긴 자취를 남겼다. 그는 숨을 삼켰다. ‘저기, 그녀가 오고 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믿기 어려울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일찍 오셨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감미로운 선율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아뇨, 조금 전에요. 서윤 씨, 많이 보고 싶었어요.


도준은 말을 약간 더듬었다. 더 이상 로체 직벽만을 향해 돌진하던 천하무적의 원시인 같은 사내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 수줍게 서 있는 한 어린 소년. 22년 전 횡계로 되돌아간 듯,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도준은 심장이 당기는 듯한 달콤한 통증을 느꼈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만큼 강렬한 충동이었다. ‘약혼자가 있는 여자’라는 사실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때, 종업원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뚜벅뚜벅 울리는 발소리가 금기를 일깨우는 현실의 경고음처럼 그의 깊은 심연을 두드렸다. 그녀는 풋,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의 뜨거운 열정을 읽고 있었다. 마음을 들켜버린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종업원이 물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얼음은 듬뿍 넣어 주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그녀는 도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을 살피더니 겸연쩍은 듯 손끝으로 가볍게 부채질을 했다. 도준은 문득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우선 날씨 이야기로 어색한 기운을 덜어보려는 걸까.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피커에서는 크랜베리스의 ‘링거’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장미를 살 걸 그랬나.’ 다시금 마음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그는 망설이듯 옆 의자에 두었던 꽃다발을 들어 조심스레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나, 프리지어네요. 저한테 주는 거예요? 정말로 저한테요?


도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도준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번졌다. 짧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종업원이 음료를 들고 오다가 홀 중앙에서 멈춰 섰다. 앞 테이블에 있던 여자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들 곁에는 투명한 빛의 막이 감돌기 마련이었다. 그 안에서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세상의 소음도 잠시 스러졌다. 도준과 서윤 사이로 스며든 공기는 미세한 전류처럼 파동을 일으켰다. 그들의 숨결 하나하나가 온화한 향기가 되어 홀 전체에 퍼져나갔다.


-당신에게는 장미보다 프리지어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저를 위해 꽃집에 다녀오신 거죠? 저는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밝게 웃었다. 도준은 그 안에 스쳐 지나간 엷은 감정의 물결을 느꼈다.


-아니요. 오늘 이렇게 와 주셨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


그녀는 말없이 꽃의 향기를 맡았다. 은은하게 번지는 꽃내음처럼 그녀의 미소가 살포시 피어났다. 햇살처럼 스며드는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눈부셨다. 윤기 흐르는 머릿결, 가녀린 목과 얇은 옷감이 그려 내는 가슴과 허리의 유려한 곡선을 바라보며, 그녀의 몸이 지금, 한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생의 빛을 발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의 약혼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 질문이 떠오른 순간, 마음 한쪽이 쑤시듯 아려왔다. 어쩔 수 없는 질투, 패배 의식 같은 것이었으리라. 애써 시선을 거두려 했지만, 모든 빛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와 결국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나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녀는 내 앞에 있지 않은가.


한여름 해바라기처럼 목마른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종업원이 건넨 유리잔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컵에 든 얼음이 찰랑거렸다. 그녀는 찬 음료를 몇 번에 나눠 들이켰다.


-아직도 자다가 물에 빠지는 꿈을 꾸나요?


한참 만에 도준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가끔요. 그건 왜요?

-제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 가시죠.


도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의 발끝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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