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도심의 빌딩 숲 사이, 호수처럼 맑게 번진 하늘이 눈부셨다. 가로수 길 위에는 잘게 부서진 햇살이 반짝였고, 초여름 공기에는 가슬가슬한 서늘함이 스며 있었다.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도준은 은행 앞 빈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운 뒤, 잠시 망설이다 길가의 꽃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 문을 여는 순간, 향긋한 꽃내음이 그를 감쌌다. 실내 곳곳에는 흐드러지게 핀 색색의 꽃들과 정성 들여 가꾼 화분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꽃집 출입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문턱을 넘으려다 멈춰 섰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화려한 조명과 색채의 향연 속에서, 그는 현실에서 한 발 비켜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카운터 뒤에는 레이스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진한 핑크색 방울철쭉을 포장하다 말고, 유치원 원장처럼 부드럽게 감겨오는 음색으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무슨 꽃을 찾으시나요?
-글쎄요. 먼저 좀 둘러볼게요.
-네네. 그럼 구경하세요.
도준은 진열대 사이를 걸으며 꽃들을 살펴보았다.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지만, 그 안에 선 그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손끝으로 꽃잎을 스치듯 어루만지자, 여리고도 보드라운 감촉에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조차 잠시 잊은 듯했다.
그가 살아온 세계는 거대한 바위와 얼음벽, 거친 바람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이 작은 꽃집은 섬세한 균형과 정제된 아름다움이 흐르는 곳, 전혀 다른 자연이었다. 철든 이후로 줄곧 산을 올랐고, 천년설이 흩날리는 히말라야에도 여러 차례 도전해 왔다. 그런 그가, 이 작은 공간에서 어쩐지 말문이 막힌 채 서 있었다.
꽃들은 향기롭고 찬란했지만, 누군가의 손길과 의도가 빚어낸 조형물이기도 했다. 이곳은 그가 경험해 온 자연과는 결이 다른 세계였고, 동시에 가공된 아름다움이 숨 쉬는 공간이었다. 그에게는 낯선 질서였다. 만약 서윤이 아니었다면, 그는 평생 이런 곳에 들어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로 인해 펼쳐진 세계는 그에게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지각의 전이를 일으켰다.
도준이 선뜻 꽃을 고르지 못하자, 점원이 다가왔다.
-어떤 꽃을 드릴까요?
-글쎄요… 좀…
-혹시, 어느 분께 선물하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순간, 도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아니, 뭐…
그는 말끝을 흐리며 귀 뒤를 긁적였다. 어느 분이라니. 그녀는 내게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직 그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존재로 영원히 남을지도 몰랐다. 도준이 눈을 끔뻑이며 대답을 망설였다. 점원이 빙긋 웃었다.
-혹시 여자분께 드릴 거면, 나이를 살짝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으음… 젊어요.
-아, 젊은 여자분이시군요! 혹시… 여자 친구?
도준은 머리를 만지며 눈을 피했다.
-호호, 다들 처음엔 그렇게 쑥스러워하죠. 얼굴이 빨개졌네요.
점원이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어… 어떤 꽃이 좋을까요?
-글쎄요, 꽃은 다 예쁘죠. 여자분들은 남자분이 주는 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죠. 처음이라면 장미가 무난하지 않을까요?
-아, 그런가요…
-그렇죠. 장미죠.
잠시 후, 꽃집을 나선 도준의 손에는 프리지어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장미를 살 걸 그랬나…
그녀에게 이 꽃이 괜한 짐이 되지는 않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분명, 손 닿지 않는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었다.
-괜찮아. 겨우 꽃 한 다발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