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방화동 집에서 인사동 리온 갤러리까지, 아무리 서둘러도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거리였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 도착한 그녀는 재킷을 벗어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직장 상사의 눈총을 피하려면 가능한 한 1분이라도 먼저 도착해야 했다.


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서자, 탕비실에서 머그잔을 든 경숙 씨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화사하게 보이는 그녀가 서윤의 후줄근한 몰골을 위아래로 훑으며 빈정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지각이라니요?

-응, 집에 좀 일이 있어서.

-아까부터 관장님이 찾으셨어요. 빨리 올라가 보세요.

-진짜? 알았어.


관장이 그녀를 찾은 이유는 분명했다. 어제 명명희 선생 작업실에 다녀온 결과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성과라 부를 만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관장이 듣고 싶어 할 말만 빠르게 추려낸 뒤 핸드백을 2층 사무실에 내려놓고는 곧장 3층으로 향했다.


관장실 안에는 서늘한 공기 속에 진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최희숙 관장은 올리브색 정장 안에 흰색 블라우스를 산뜻하게 받쳐 입고 있었다.


뿌리 염색 시기를 살짝 놓친 듯 앞머리 부근에 희끗희끗한 기운이 드러났다. 그녀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오늘 좀 늦었네. 아침잠이 많은 편인가?

-아, 아닙니다. 오늘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죄송합니다.

-어제는 어땠어? 명명희 선생님은 잘 지내시지?

-아직 일본에 계세요.

-아직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건가?


관장의 입가에는 염려보다 실망에 가까운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제는 관장님이 직접 나서셔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김순자 씨를 설득하시든,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가 명명희 선생님과 대화하시든지요.


서윤은 궁색하게 들리지 않도록 관장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며 말을 꺼냈다. 여러 번 되새긴 끝에 어렵사리 내뱉은 말이었다. 관장과 명명희 작가는 오랜 세월 두터운 친분을 이어온 사이였다. 관장실 한쪽 벽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듯 명명희 선생의 젊은 시절 동양화 한 점과 유화 소품 몇 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만약 명명희 선생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때는 정말 상황을 돌이키기 어려울지도 몰라.

-예전에 큰 도움을 주신 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맞아. 명명희 선생이 힘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든든하게 서포트했는데. 화가 한 명 제대로 키워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선생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

-맞아요. 관장님께서 나서시면 명명희 선생 측에서도 모른 척하지 않을 거예요.


서윤은 어제 김순자 씨 사무실에서 본 미발표작 ‘사월의 정원’에 대해 한동안 설명을 이어갔다. 명명희 선생의 그림 세계가 변곡점을 지나 더욱 깊고 넓게 확장되었다는 이야기는 최 관장의 눈빛까지 반짝이게 할 만큼 흥미로운 뉴스였다.


한국 화단의 대모를 자처하는 그녀에게, 명명희 작가의 마지막 불꽃 같은 하이라이트를 함께 만들어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마음속 욕망을 자극하는 눈부신 매혹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김순자 씨에게는 내가 직접 연락해 볼게. 그런데 오늘 피노키오 견학 일정은 어떻게 되지?

-오후에 한 팀 있어요. 아현초등학교에서 서른 명 정도 방문할 예정입니다.

-좋아. 이번에도 서윤 씨가 사고 없이 잘 진행해 줘.

-네. 알겠습니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적절히 섞어 해설해 주면 아이들도 흥미로워할 거예요.


리온 갤러리 4층에는 피노키오 특별 전시관이 있다. 네 구역으로 나뉜 이 공간은 피노키오와 관련된 각종 오브제와 그림, 기획 아이템들로 빼곡하다. 큰 조형물과 모형은 바닥 위에 설치 작품처럼 배치되어 있고, 작은 소품은 유리 상자나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작품은 관장과 남동생 최승주 실장이 오랜 시간 세계 경매장을 누비며 수집한 것들이다.


처음부터 피노키오 테마파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전시관답게 연중 내내 어린이 단체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현초등학교 역시 매 학기 꾸준히 학생들을 보내오는 단골이었다. 


서윤은 오전에 처리할 일들을 정리한 뒤 사무실 데스크에 앉아 아이들에게 들려줄 전시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파일을 하나하나 펼치며 눈으로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 스쳐 갔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피노키오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생한 숨결로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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