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다음 날, 서윤은 평소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의 숙취로 인해 흐릿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면서, 어젯밤 인사동 골목에서 태일과 말씨름을 벌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말을 놓겠다고 내둥 큰소리를 쳤지만, 그게 과연 잘한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알람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에 맞춰 둔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어댔을 때 잠깐 정신이 들기는 했다. 그런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앗, 지각이다!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얼굴은 푸석했고, 수세미처럼 뒤엉킨 머리에서는 쿰쿰한 머릿기름 냄새마저 났다. 하루 정도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늘 갤러리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 출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고무줄로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는 거실로 내려갔다. 속이 메스꺼워서인지 집 안에 퍼진 된장찌개 냄새가 조금 역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친구 부모님의 발인식에 들르기 위해 새벽같이 나가셨다고 엄마가 말했다. 출근 시간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라도 감고 나갈 채비를 하려면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엄마, 국 없어? 속이 좀 쓰려.
-어제도 제이랑 둘이 마신 거야? 여자애들이 무슨 술을 그리 퍼마셔?
-어쩌다 그럴 수도 있지.
-에고, 내 팔자야. 딸년 술국까지 끓여 바쳐야 한다니…
엄마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더니 낡은 동전 지갑을 챙겨 들고 허둥지둥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 나갔다. 욕실에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오자 압력밥솥 꼭지가 딸랑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서윤은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가스레인지 불을 줄였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올케가 조카 선호를 안고 들어왔다. 올케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목소리까지 착 가라앉아 매가리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아가씨, 나 속상해서 죽겠어요. 선호 아빠, 또 집 나갔어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어젯밤에 잔소리 좀 했어요. 가장이면 최소한 생활비라도 벌어와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 인간, 이번 달 월세 내려고 모아둔 돈까지 챙겨서 그냥 튀었어요. 아휴, 이 원수! 당장 이혼할 거야. 이젠 나도 못 참아요.
올케는 아이를 소파에 눕히며 울분 섞인 말들을 쏟아냈다.
-어휴, 오빠가 또 왜 그런데요…
서윤은 머리에 수건질을 하며 담담히 대꾸했지만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오늘따라 올케의 모습이 유난히 초라하게 보였다.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옷차림, 부스스한 파마머리, 수심으로 가득한 꺼칠한 얼굴이 갑갑한 일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왜 다른 집 남자들처럼 성실하게 살 생각은 안 하고 순 사기꾼 같은 놈들이랑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미친놈! 허랑방탕한 놈!
올케는 급기야 오빠를 향해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선호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아이였는데 올케의 날 선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비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마침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침부터 왜 애를 울리고 난리냐. 저리 비켜라.
엄마는 두부와 콩나물이 든 비닐봉지를 올케에게 떠넘기고는 어린 손자를 덥석 품에 안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야. 어디서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가?
엄마는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올케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어머니, 암탉이라니요. 지금이 무슨 19세기도 아니고,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요, 저희 이제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어요. 무서울 거 하나 없다고요.
만만치 않은 기세로 되받아치는 올케의 말에 엄마의 낯빛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
-지금 이 시어미를 찍어누르겠다는 거냐? 다 시끄럽고, 서윤이는 뭐 하니? 얼른 나갈 준비해야지.
-저도 아가씨처럼 밖에 나가서 일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선호는 어쩌고?
-뭐, 어머니가 봐주시겠죠. 아범 대신 저라도 나서야 선호 우윳값은 벌지 않겠어요?
-내가 언제 너희를 굶기디? 오늘 내 속을 긁기로 작정했구나.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가서 콩나물국이나 끓여라. 난 선호 얼굴 좀 씻길 테니.
엄마는 선호를 번쩍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어머니, 저희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아야겠어요. 이번 달 월세, 아범이 다 들고 튀었어요. 아셨죠?
올케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엄마는 대꾸 없이 욕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바람에 서윤의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곧 욕실 안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쏟아져 나왔는데, 가족 간에 엉겨 붙은 갈등을 어떻게든 덮어보려는 헛된 소음처럼 들렸다.
자식이란 끝내 부모가 짊어져야 하는 업보일까. 오빠가 저질러 놓은 무책임한 일들이 이제 늙은 부모의 짐으로 되돌아온 듯싶어 서윤의 마음은 더없이 불편했다.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가볍게 화장을 한 서윤은 빈속을 달래기 위해 식탁에 앉아서 급히 한술 뜨기 시작했다.
올케는 옆에서 지치지도 않고 같은 레퍼토리를 되풀이했다. 왜 오빠를 도와주지 않느냐는 원망이 그 모든 말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오빠가 허풍쟁이에 노름꾼, 결국 쓸모없는 낙오자라는 말들은 사실 자신을 향해 던져진 돌멩이처럼 가슴에 콕콕 박혔다. 핏줄에 대한 험담은 여전히 불쾌하리만큼 거북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자신이 둘러메어야 할 몫처럼 버겁게만 느껴졌다.
‘왜 우리는 맨날 이 모양인가.’
서윤은 쓴 담즙처럼 치밀어 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계속 속이 헛헛하고 공허함만 맴돌았다.
‘어제 술을 괜히 마셨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그다음 얘기는 나중에 해요. 이러다 진짜 지각하겠어요.
서윤은 올케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은 위로를 담은 토닥임이라기보다 막막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