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하지만 태일이 품고 있는 상자 안에는 훨씬 더 즉물적인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결혼 절차를 계속 미루면서도, 틈만 나면 그녀를 호텔 방이라는 밀실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 순간마다 서윤은 마치 팔려 온 여자처럼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다뤄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때론 숨이 막히고 수치스러웠으며, 억울함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이런 일과 이런 감정에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성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에 뭐가 더 중요한 게 있지?


언젠가 태일이 한 그 말은 서윤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했다. 그때 그녀는 ‘사랑’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손에 쥐고 있는 그 단어의 무게나 형태를 온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행복은 끔찍한 재앙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만약 행복이라는 감정이 신기루처럼 부풀려진 허상이라면, 사람들은 왜 결혼을 권하고 또 요구하는 걸까. 결혼과 섹스 대신 다른 형태의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랑의 감정은 다 비슷비슷한 걸까?


서윤의 목소리가 작게 허공에 흩어졌다. 제이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인류애와 이성 간 사랑은 다를까?

-질문의 요지가 뭐야?

-아이에 대한 사랑과 강아지에 대한 사랑은?

-그건 그냥… 다르게 아픈 거지, 바보.


제이가 장난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나는 바보인가 보다.


서윤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무슨 일 있네. 그렇지?


제이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서윤은 맥없는 표정으로 허공에 걸린 수레바퀴를 올려다보았다.


-‘수레바퀴 밑에서’라는 제목이 이제 이해될 것도 같아. 사랑도 결국 제자리만 맴도는 건 아닐까?


그녀가 손가락으로 수레바퀴를 가리켰다.


-넌 생각이 너무 복잡해. 힘들면 그냥 수레에서 뛰어내리면 돼.


제이가 말했다.


-아니. 난 지금, 그 바퀴 밑에 깔린 것 같아.


제이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껍데기째 바삭하게 튀긴 새우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얼른 먹어. 뜨거울 때가 제일 맛있어.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들은 말없이 술을 마시고 기름진 안주로 영혼의 허기를 채웠다. 때로 침묵이 가장 깊은 대화가 되기도 하니까.


-사실은,


두 번째로 주문한 술잔이 테이블에 놓였을 때, 서윤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꾸 어떤 남자가 생각나.


제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남자? 어떤 남자?

-저번에 횡계 갔을 때,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있어.


서윤은 비밀을 흘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그 사람이 떠오르면 마음이 이상해져.


제이는 기겁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맙소사! 다른 남자라니? 애가 큰일 날 소리하고 있네.


제이가 눈을 부라리며 종주먹이라도 들이댈 기세였지만, 서윤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


문득, 귓가에서 되살아나는 목소리. 가슴 한편이 여전히 저릿저릿했다. 그날, 그 순간, 그리고 그 말이 가져온 묘한 떨림.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이었고, 끝내 지켜낼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는 누구일까. 왜 그날의 공기와 속삭임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 서윤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의 역류에 목이 타는 듯 레몬 하이볼을 연거푸 꿀꺽꿀꺽 삼켰다.


-말해 봐. 누군데? 어떤 남자야?

-수레바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 닿을 수 없는 풍경처럼 멀고, 그래서 자꾸 생각나는 사람.


서윤은 단어 하나하나를 어렵게 내뱉고는 자신도 모르게 푸 웃었다. 그 웃음은 슬픔 대신이었고, 그리움에 대한 한숨 소리와 같았다. 횡계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사람. 어쩌면 꿈속에서 꿈을 꾼 것이 아닌지, 문득 궁금해지는 그날의 목요일 오후.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봄날의 숨결처럼, 그렇게 희미해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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