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근데 왜 반말했는데? 둘이 싸웠어?
서윤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피했다. 정작 자신도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왜 그동안 눌러둔 말들이 터져 나온 건지, 왜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일의 차에 오르지 않은 일, 호텔에서의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뻔히 이어질 절차를 거부한 일… 이제는 그 남자의 숨소리가 몸에 닿는 것조차 거슬렸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서윤은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가 오히려 깊은 상처를 떠안는 장면은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자기 몸에 가해진 폭력조차 발설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아픈 기억은 종종 침묵 속에 묻힌 채, 잊히기만을 기다리며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서윤 역시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앞에서도 태일과의 마찰에 담긴 진실을 끝내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기세에 떠밀려 어떤 자리에 이르게 된 경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는 일은 지금의 그녀에게 불가능했다.
여자의 몸은 순결과 욕망 사이, 그 어디쯤을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자신의 욕망이고 무엇이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인지 어렴풋이 알아차린 뒤에도, 그때의 기억을 자기 안에서 분리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쓰라리게 다가왔다.
-왜 싸웠냐니까?
제이가 다시 물었다.
-오늘 다래원에서 저녁 먹었는데, 그 식당이 구리다는 거야.
-다래원이 구리다고? 인사동에서 은근히 분위기 맛집인데.
-그치?
-근데… 뭐가 싫다는 거야?
-글쎄…
태일의 일그러진 표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실룩거리는 턱선, 가늘게 떨리는 콧볼, 목소리에 배어 있는 위압적인 기운. 그의 분노는 일시적인 감정의 폭발 같았지만, 그 뒤에는 그녀의 앞날을 죄어 오는 덫이 숨어 있었다. 어쩌면 오늘 일로 그가 먼저 파혼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난다면 속이 시원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가족들, 특히 연로한 부모를 생각하자 금세 목울대가 뻐근해졌다.
-서윤아.
제이가 한참 뜸을 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결혼하면 그 집안 식구들하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안 맞는 것도 많을 거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순간도 있을 텐데.
제이가 불쑥 문제의 본질을 짚어내자, 서윤은 모른 척 술잔만 홀짝거렸다. 제이도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메트로놈의 박자처럼 자의식을 흔들던 그때, 낡고 통속적인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결혼이 꼭 필요한 걸까?’
비록 약혼까지 한 상태였지만, 지금껏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 없었다. 결혼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면서도,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애는 하나 낳아야지’ 같은 주변의 속삭임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결혼과 육아’는 여전히 비밀 상자처럼 감춰진 미지의 영역이었다. 진실이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곁을 맴도는 시도일지도 몰랐다. 진짜가 아닌 진실은, 어떤 대답으로도 결코 완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대학 시절, 어느 교수가 검은 천으로 덮인 상자를 내밀며 그 안에 손을 넣어보라고 한 일이 있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 채,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한 명씩 손을 집어넣었다. 서윤도 차례가 되어 동그란 구멍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짧은 순간,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 속에 어두운 허공을 배회하던 손끝. 마침내 차갑고 물컹한 무언가에 닿았던 그 촉감의 기억.
상자 안에 무엇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지금 자신이 맞닥뜨린 삶의 ‘질문’들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삶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자 안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주입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상자 위에 검은 천을 덮어씌운 채, 그것이 달콤함의 근원인 양 가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음속에서 번지는 불안과 의문이 상자 안 어둠처럼 그녀의 내면을 잠식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