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홍대 앞 피카소거리는 여느 날처럼 길가를 가득 메운 인파와 차량의 행렬로 어수선했다. 뒤숭숭한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니, 제이와 만나기로 한 선술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둑한 실내에는 젊음과 낭만이 어우러진 소요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제이는 홀이 내려다보이는 통로의 한쪽 테이블에 앉아, 반쯤 비운 맥주잔을 곁에 둔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제이가 앉은 자리 위에는 수레바퀴 모양의 인테리어 장식이 매달려 있었는데,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재수 없이 저 수레바퀴가 굴러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서윤이 다가서며 수레바퀴를 가리켰다.


-우리는 이미 수레바퀴 밑에서 살고 있는 거야. 어서 와, 친구.


제이가 책을 덮으며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어두운 데서 책 읽다간 눈 버리잖아.

-괜찮아. 어차피 조금씩 낡아가며 사는 게 인간의 운명이야. 그런데 무슨 일로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서윤은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태일 앞에서는 약속이라 둘러댔지만, 그 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발길은 어느새 제이가 있는 홍대로 향하게 되었다.


-근데 너무 늦게까지 일하면 힘들지 않아?

-영세 출판업자의 영업 비밀이라고 했잖아. 무조건 열심히.

-진짜 못 말려.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온 내가 고맙지?

-그래, 고맙다. 아주 눈물 나게.


서윤이 장난스레 입술을 삐쭉거렸다. 제이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풀리면서,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도 한결 누그러졌다. 소중한 친구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오늘 밤은 제이와 마주 앉을 조용한 테이블 하나면 충분했다.

 

제이의 숏커트 머리는 이전보다 훨씬 짧아 보였다. 원고를 볼 때 흘러내리는 앞머리가 자꾸 신경 쓰여 결국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교정쇄 볼 땐 머리띠 하면 되잖아.

-나 머리띠 하면 얼굴형 이상해져. 내가 너처럼 생겼냐?

-그만, 알았어. 잘 잘랐어. 더 잘라도 돼.


서윤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제이는 초저녁에 자장면을 반쯤 먹다 만 터라 속이 출출하던 참이었다. 서윤도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슬슬 허기가 돌았다.


-한번 시켜 볼까나?

-당근 좋지요.


식당 안에서 풍기는 다양한 음식 냄새가 침샘을 자극하며 위장 깊숙이 뜨거운 갈망을 불러왔다. 메뉴판을 한참 뒤적이던 두 사람은 모둠꼬치와 시금치 한우나베, 새우튀김을 골랐다. 선술집에 온 손님이 주류 섹션을 그냥 지나치는 건 반칙에 가까웠다. 서윤은 레몬 하이볼을, 제이는 모히또 칵테일을 추가로 주문했다.


-잠깐! 너무 많이 시킨 건가? 하나 뺄까?

-괜찮아.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잖아.

-나 요즘 좀 찐 거 같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딱 좋아.

-진짜?

-진짜지, 그럼.


식욕과 자존심 사이의 이런 실랑이는 여자들끼리 흔히 주고받는 대화 중 하나였다. 그녀들 사이에도 그 유쾌한 말장난이 오랜 습관처럼 이어져 왔다.


화제의 맥락은 피트니스 클럽과 다이어트 보조제를 거쳐 어느새 명명희 선생의 평창동 작업실로 흘러갔다. 서윤이 낮에 본 미발표작 ‘4월의 정원’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종업원이 안주와 술을 차례로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제이는 술잔을 들던 손을 멈추고 서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왜 그래? 너 뭐 있지?

-그냥 왔다니까. 아무 일 없어.

-그 얼굴, 할 말 있는 얼굴이잖아.


서윤은 곤란한 듯 입술만 달싹였다.


-왜? 어서 이 언니한테 털어놔 봐.

-저기… 그러니까, 나 오늘 태일 씨한테 반말했어.


제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반말?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했네.

-그렇지?

-이, 빙신아. 그게 정상이지. 잘했어.

-휴!


서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깟 반말에 기분 상했다면, 그런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마.

-그럴까?

-그딴 놈이랑 어떻게 평생을 살아? 걱정 붙들어 매.


제이의 단호한 말투가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서윤은 빙긋 웃으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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