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히말라야 원시의 설산에서, 서로를 향한 믿음보다 강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도준과 민혁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큰 위기가 닥쳐왔다. 고도계의 바늘은 7,800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상 능선 너머로 불길한 회색 구름이 몰려들었고, 거세진 바람은 등줄기를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눈보라는 마침내 폭주하듯, 분노에 찬 짐승처럼 포효하며 사면을 휘몰아쳤다.
-날씨도 안 좋은데, 잠깐 쉬었다 갈까?
-그래. 바람이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리자.
그것은 일 보 후퇴, 진정한 의미의 '전진을 위한 후퇴'였다. 로체 남벽 초등에 대한 집념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이 악마의 벽을 넘겠다는 결심뿐이었다. 두 친구는 깎아지른 암능 틈으로 몸을 밀어 넣고, 발판이 될 만한 자리를 찾아 바닥을 다진 뒤, 눈이 얼어 단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그 위에 작은 텐트를 세웠다.
둘은 그 은신처에서 험한 날씨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풍은 쓰나미처럼 밀려와 산허리를 할퀴었고, 계곡 어딘가에선 쪼개지듯 묵직한 천둥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눈 폭풍은 사방에서 격노한 야수처럼 울부짖었고, 거센 눈발은 캠프지를 요란한 빗소리처럼 두드려댔다. 텐트는 금방이라도 찢겨 날아갈 듯 거칠게 펄럭였으며, 유닛마다 연결된 자일은 텐트 기둥을 따라 격렬하게 흔들렸다. 침낭 속에서 체온을 나누며 몸을 웅크린 두 사람은, 차갑고 딱딱한 빵을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고독과 결연함이 응고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상이 코앞인데, 늙은 마녀가 심통을 부리네.
-우리가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산이 우릴 간보는 것 같지 않아?
유령의 집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추위에 떨던 민혁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섬찟했다. 폭풍 속에서 텐트가 숨을 고르듯 요동쳤고, 들이쉬는 숨마다 날 선 공기가 목구멍을 긁으며 폐 속 깊숙이 얼음처럼 박혔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한 악천후라 해도, 그들은 반드시 견뎌내리라는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어. 우리는 끝까지 버텨야 해.
-지금 뜨끈한 밀크티 한 잔만 마실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어.
-브랜디 탄 에스프레소라면, 내 목숨이랑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따뜻한 아랫목에서, 계란에 파 송송 썰어 넣고, 고춧가루 뿌린 라면 한 그릇 먹으며 야동 한 편만 볼 수 있다면, 다시는 이런 빌어먹을 산엔 오지 않겠어. 내 두 다리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아냐, 나는 야동 대신 짜장면.
-어허! 아니지. 짬뽕이지.
노호하는 바람 속에서 두 친구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지만, 서로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견딜 수 있었다. 어둠과 추락의 위협, 차가운 죽음의 기척이 사방에서 밀려왔지만, 그들의 우정은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서로를 따스하게 감쌌다.
산 능선은 이미 어두워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멀리 바룬체(7,152m)와 아마다블람(6,814m)의 정상만이 빨간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금세 주위가 침침해지더니, 어느새 새카맣게 파묻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가슴속 깊이 파고들며 숨을 옥죄었다.
-젠장, 대체 왜 이런 데 올라온 거지?
-우리 둘 다 돌았으니까.
-맛이 간 거지. 제대로.
-정신 똑바로 차려. 바람에 휩쓸리기 십상이야.
-여기서 날아가면, 뼈도 못 추릴걸.
둘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 같았다. 결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밤이었다.
일출 전의 몇 시간은 언제나처럼 지독히 춥고, 지루했다. 멀리 산봉우리 위로 어슴푸레 붉은 아침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며, 날씨가 조금씩 풀릴 조짐을 보였다. 살을 에는 바람도 점차 잠잠해졌다. 첫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어올 무렵, 그들은 다시 빙탑에 매달렸다. 얼음 표면은 단단히 얼어 있었고, 아이젠은 그 속에 깊숙이 박혔다. 오른손에는 아이스 픽켈, 왼손에는 아이스바일을 쥐고, 발톱으로 얼음을 찍으며 한 발씩 신중하게 올랐다.
프론트 포인팅으로 얼음벽에 매달린 채, 중간 확보물로 쓸 피톤을 얼음 속 깊숙이 박아가며, 숨결과 땀방울을 빙벽에 새기듯, 조심스레 전진했다. 발 아래 끝도 모를 협곡에서는 저승사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천 길 낭떠러지 밑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기다렸다. 한 발짝만 실패해도, 그곳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늑골 모양을 한 얼음층과 녹은 눈이 바위 표면을 살짝 덮은 베르글라 지대를 지나, 홈통처럼 생긴 로체 쿠로와르까지 꼬박 12시간을 올랐다. 마침내 정상 설원을 눈앞에 둔 순간, 그때부터 눈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골짜기 위에 끼어 있던 안개가 점차 번지며 하늘을 뒤덮었다.
로체봉은 죽음을 부르듯 몸을 뒤척였고,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사나운 돌풍에 휘말리며 숨을 쉬기조차 곤란할 정도였다. 더 이상 올라가면 다시는 내려올 수 없을 것이 뻔했다. 한순간, 자연의 위엄과 잔혹함이 얽히며, 생과 사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안 되겠다. 일단 후퇴하자.
-젠장! 내가 앞장설게!
민혁이 절규하듯 소리치며 먼저 몸을 돌렸다. 시바 신은 끝내 그들을 거부한 채, 응징하듯 모든 희망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뼈저린 절망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던 그들은, 미친 듯이 아이스 픽켈을 찍으며 목숨을 건 하강을 시작했다. 거센 풍압이 그들을 감싸고 있던 옷을 갈기갈기 찢을 듯했다. 발아래 눈은 붕괴하듯 미끄러져 내리고, 시야는 점점 더 뒤틀려갔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고, 내면 깊숙이 솟구치는 공포가 어둠의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시야 확보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제트기류가 휘몰아치는 절벽 위로,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낙석 하나가 도준과 민혁의 몸을 잇고 있던 자일에 날카로운 도끼날처럼 내리꽂혔다. 순간, 자일이 터져나가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내며 위로 튕겨 올랐다. 도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아이스 피켈을 얼음과 바위틈 깊숙이 쑤셔 박았다. 그러나 한발 앞서 내려가고 있던 민혁은 몸을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짐 무게를 줄이려던 선택이 결국 화근이었다.
-아아악!
민혁의 비명이 절벽을 타고 메아리치며 하늘로 흩어졌다. 시간은 블랙홀에 빨려드는 듯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채, 세상은 한순간 정적에 잠겼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포와 함께, 생의 탯줄이 끊어지는 듯한 끔찍한 절망이 덮쳐왔다. 눈앞에서 민혁의 몸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조금 놀란 듯,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민혁의 모습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
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 속으로, 그의 모습은 아스라이 흐릿한 그림자처럼 사라져 갔다.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사라져가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낭떠러지를 향해, 울부짖는 목소리가 한없이 번져갔다. 이제 남은 흔적이라곤, 하늘에서 날아드는 눈보라에 묻혀버린 마지막 절규뿐이었다.
요즘도 한밤중에 문득 눈을 뜨면, 민혁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로체봉 깊은 골짜기, 바위틈 어둠 속에서 여전히 그를 부르고 있을 친구의 얼굴이. 도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들의 등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다려라, 친구.
이제 민혁의 목숨값을 되갚아야 할 시간이다. 도준은 눈을 감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결의가 온몸을 뜨겁게 채웠다. 이번에는 반드시, 정상에 설 것이다. 한때 자일 파트너로서 나눴던 깊은 우정, 민혁의 죽음을 더는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