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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선 ㅣ K-포엣 시리즈 4
허수경 지음, 지영실, 다니엘 토드 파커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12월
평점 :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시를 멀리했던가.
에세이나 문학, 실용서에 비해 시와의 거리가 멀었던 건 사실이다.
허수경 시인의 시를 처음 읽게 되었는데 페이지마다 쓸쓸함이 묻어난다.
<허수경 시선>(허수경 시, 지영실/다니엘 토드 파커 옮김, 아시아, 2017)은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하는 한영대역 한국 대표 시선인 K-포엣 시리즈 중 하나이다.
'언제나 머리맡에 두고 읽고 싶은 한국 시의 정수를 뽑아
영어로 번역해 한영 병기한 후 국내외 시장에 보급하고자 하는
‘K-포엣’의 취지에 걸맞게 한국의 대표 명시의 말맛을 잘 살린
부부 번역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흰 꿈 한 꿈
혼자 대낮 공원에 간다
술병을 감추고 마시며 기어코 말하려고
말하기 위해 가려고, 그냥 가는 바람아, 내가 가엾니?
삭신은 발을 뗄 때마다 만든다, 내가 남긴 발자국, 저건
옴팍한 속이었을까, 검은 무덤이었을까, 취중두통의 길이여
고장난 차는 불쌍해, 왜?
걷지를 못하잖아, 통과해내지를 못하잖아, 저러다 차는 썩어버릴까요
저 뱀도 맘이 아파, 왜?
몸이 다리잖아요 자궁까지 다리잖아요 그럼,
얼굴은 뭘까?
사랑이었을까요......
아하 사랑!
마음이 빗장을 거는 그 소리, 사랑!
부리 붉은 새, 울기를 좋아하던 그 새는 어디로 갔나요?
그런데 왜 바보같이
벌건 얼굴을 하고 남몰래 걸어다닐 수 있는 곳만 찾아다녔지?
그 손, 기억하니?
결국 마음이 먹은 술은 손을 아프게 한다
이 바람......
내 마음의 결이 쓸려가요 대패밥 먹듯 깔깔하게 곳간마다
손가락, 지문, 소용돌이, 혼자 대낮의 공원
햇살은 기어코 내 마음을 쓰러뜨리네
당신......
행마다 그리고 행간마다 뭔지 모를 외로움이 베어 있다.
감히 그 마음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독함.
작가의 노트에 시인의 생각이 잘 녹여 있다.
허수경 시인은 현재 독일에서 거주하며, 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십자가라는 것이 한 종교에 속한 상징이라면
다른 종교에 속한 어떤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간절한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시간을 공감하는 것,
그것은 시를 쓰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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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어느 순간이 가지는
강렬한 사랑을 향한 힘.
그것이 시를 쓰는 시간일 것이다.
시를 쓰는 순간 그것 자체가 가진 힘이
시인을 시인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오늘따라 궂은 날씨. 어두운 그대로 놔둔 채 따라 써보았다.
그리고 읽기만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허수경 시선>은 시인의 대표작을 모은 것인 만큼
한글도, 번역본도 두고두고 천천히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