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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단경로 - 제2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강희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하라.
우리가 '맵'에 던지는 미션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 버전으로 업데이트된 맵은 항상 '최단경로'를 안내해 준다. 강희영 장편소설 <최단경로>는 '맵'에 잡히는 그 사람의 노드(node)를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큰 이야기 줄기는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책의 중간까지 등장인물의 '끊김' 또는 '생각의 버퍼링' 때문인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난 후, 전체적인 그림이 떠오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혜서는 그 뒤로 다시 한국에 돌아갔을까, 애영은 안락사를 택했을까, 마이레는, 진혁은?

그는 짧게 자기소개를 한 다음 화이트보드에 두 개의 점을 찍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저 점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너무 뻔한 질문이라 오히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새 그가 두 점을 직선으로 이었다. 이걸 모를 줄은 또 몰랐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도 다 알 텐데. (중략) 아이가 엄마한테 뛰어가는 걸 보면 저렇잖아요. ..기계들도 마찬가지예요.
강희영 장편소설 <최단경로> p.31
시작은 라디오 피디인 '혜서'가 전임자인 '진혁'이 남겨놓은 트랙에서 '어떤 소리'를 발견하고,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진혁과 같은 계정을 쓰게 되면서 그가 '예상 밖 경로'로 이탈한 것을 보고 의문을 가지며, 그 뒤를 쫓아가게 된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아니면 뭔가 숨어 있는 다른 감정이 있었던 걸까? 다양한 상상을 하면서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애영이 왜 다미안의 프로그래밍 코드 수업을 듣는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혜서는 왜 전임자인 '진혁'의 발자취를 따라 암스테르담까지 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하지만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고 나서 "아하~"라며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이 왔다.
소설의 중간중간에 현재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작가의 생각이 언뜻언뜻 보였다. 가령, 이런 구절.

개인을 어떤 집단의 일부로 치부하는 것, 그리하여 그를 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차별이란 그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해야 당연한 걸로 알아먹게 할지 매번 피로했다.
강희영 장편소설 <최단경로> p.33
개인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의 일부'로 치부하고, 그 집단의 프레임을 씌워 버리는 것. 그게 바로 차별이란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그 사람의 배경과 소속을 보고 그 사람은 어떠할 것이라는 단정을 짓는 것에 익숙하니 말이다.

내가 <최단경로>를 읽으면서 방점을 찍은 곳은, 눈물샘이 터진 곳은, 희한하게도 안락사 심사관에게 애영이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털어놓을 때였다.

아이에게 말해줘야 하거든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완전히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설명해줘야 해요. 아이한테는. 그러려면 배우는 수밖에 없어요. 내 아이는 어쩌면 손을 들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렇게 됐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자기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그렇게 됐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이죠. 나한테 미안해할지도 몰라요. 또 우리 엄마는요.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나는 배우고 죽어서 아이랑 엄마한테 얘기해줘야 해요. 그런 게 아니라고.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내 아이는 그걸 모른단 말이에요.
강희영 장편소설 <최단경로> p.123
엄마와 아이를 동시에 잃은 엄마의 절규가 그대로 느껴진다. 이 와중에 공부를 할 정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같은 엄마로서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애영의 마음이 느껴져서 애잔하고 가여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아이와 엄마를 위해, 어떻게 당신들이 죽었는지 최선을 다해 설명하기 위해 배운다는 것.
이 부분에서 책에서 잠시 눈을 뜨고 멍하게 있던 건, 하필 이 책을 읽고 있는 오늘이 엄마의 10번째 기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건강해지리란 믿음 하나로 버티다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떠난 엄마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쳤다. 그리고 자살 혹은 안락사를 선택지로 둔 애영의 심정도 너무 크게 공감이 갔다. 사실, 소설 전체를 놓고 볼 때 많은 사람들의 방점은 여기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여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많은 여운을 남겨둔 채 마지막 장을 닫게 되어서, 여전히 '맵' 속에서 등장 인물들의 '노드'가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남겼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의 여운도 오래 남는다.

무엇이건 알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그 앎에 갇히고 만다. 그렇게 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상실했다.
강희영 장편소설 <최단경로> p.162
제2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최단경로>.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 있는 반면에, 뚝뚝 끊어서 읽어야 할 소설도 있다. 이 책은 후자이지만, 그만큼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경로'를 제시해준다. 라디오 방송의 히든 트랙으로 '아기 옹알이'를 심어놓은 진혁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 애영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되는...공감과 울림이 큰 소설 한 편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