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허균의 누이로만 알고 있었지, 이렇게 애절한 시를 많이 남긴 시인인 줄은 잘 몰랐다.요즘 핫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온 시인, 허난설헌의 시집<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를 읽었다.(알에이치코리아 / 2018)
연밥 따기 노래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연꽃 수북한 곳에작은 배를 매두었지요.그대 만나려고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멀리서 남에게 들켜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주목할 만한 조선시대의 여성 시인 중 한 명인 허난설헌의 한시를, '풀꽃'의 나태주 시인이 편역하여 그때의 감성과 오늘의 감성이 잘 어우러졌다. 시집의 맨 앞에는 허난설헌의 생애에 관해 소개되고 있다. 이름이 허난설헌인 줄 알았는데, 본명은 허초희(1563~1589)이며, 자는 경번, 난설헌은 '당호'라고 한다.난설헌의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해왔으며 훌륭한 문장가를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타고난 기질과 가풍으로 자연스럽게 시를 접하고, 명시를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누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생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게, 그녀는 결혼을 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결혼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남편, 시어머니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며느리, 게다가 힘들게 출산한 두 아이를 잃고,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잃은, 여자로서의 삶은 거의 바닥으로 던져졌다. 친정아버지의 죽음, 평생 스승이자 글벗인 오라버니 하곡도 젊은 나이게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녀는 세상의 모든 희망을 잃게 되었다. 나쁜 일은 어쩌면 이렇게 한번에 올까.결국, 그녀는 스물 일곱이라는 너무도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나를 둘러싼 상황이 저렇게 변해간다면 그 누구도 견디지 못했으리라. 그 사연을 보니 더더욱 그녀의 시가 애절하고 슬퍼보였다.
창가에 놓아둔 난초 화분난초꽃 벙글어 향기 그윽했는데건듯 가을바람 불어와서리 맞은 듯 그만 시들었어요.어여쁜 모습 비록 시들었지만여전히 코끝에 맴도는 난초의 향기.마치도 시든 난초가 나인 듯 싶어흐르는 눈물 옷소매로 닦아요.- 허난설헌 '느낀 대로 1'
아들의 죽음에 울다..지난해 귀여운 딸을 잃었고올해는 또 사랑하는 아들이 떠났네.슬프고도 슬프다, 광릉의 땅이여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구나.사시나무 가지에는 오슬오슬 바람이 일고숲속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지전 태우며 너의 넋을 부르며너의 무덤 앞에 술잔을 붓는다.안다, 안다. 어미가 너희들 넋이나마밤마다 만나 정답게 논다는 것.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지만어찌 제대로 자라기나 바랄 것이냐.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피눈물 슬픈 울음 혼자 삼키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이 느껴져서 울컥했다. 자식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그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게다가 당시 그 상황이라면 자식이 세상을 떠나는 건 무조건 엄마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깊게 박혔을 것이니,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허난설헌은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안타깝다.
꿈에 광상산에 노닐다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를 넘나들고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