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마침내 항복을 통해 곤경에서 벗어나고 만사가 순탄하면 놓아 버림을 그만둔다. 이는 실수다. 느낌이 아무리 좋아도 더 놓아 버릴 것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놓아 버림으로써 얻은 고양 상태와 탄력을 활용하여 계속해서 놓아 버리라. - P50
놓아 버림에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기, 감정이 일어나도록 놓아두기, 감정과 함께 있기, 감정을 바꾸거나 어떻게 하려는 바람 없이 감정 스스로 제 갈 길을 가도록 놓아두기가 포함된다. - P44
우리는 계속 놓아 버림으로써 이러한 자유 상태에 머물 수 있다. 감정은 오고 가지만 나의 감정이 곧 나는 아니며 진짜 ‘나‘는 감정을 지켜볼 뿐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더 이상 자신을 감정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자각하는 ‘나‘는 늘 똑같다. 변치 않는 목격자가 존재함을 더욱더 자각하면서, 자신이 그런 의식 수준에 들어섰음을 알게 된다. 갈수록 현상의 경험자가 되기보다는 현상의 목격자가 된다. 진정한 큰나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그동안 감정에 속았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 P46
제정일치 시대의 우두머리인 판관의 시대가 끝나고 사울 부터 종교적인 수장인 제사장과 정지적인 수장인 왕으로 분리가 되고 있는데, 사무엘 상권은 바로 그 과도기를 기술하고 있다. 사울은 그 첫 번째 왕이다. 성경은 왕이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위이며 필요악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왕은 백성과 자원을 도구처럼 쓰고 전쟁으로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필요하다고 사무엘을 통해 신께 요청한다.사무엘기도 판관기의 내용처럼, 신에 의해 선택을 받은 이들, 기름부음받은이들이 신의 믿음을 저버리고 교만하게 행동함으로써 버림을 받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대사제 엘리ㅡ 자식들의 부정한 짓으로 신에게 버림받아 자식들도 죽고 자신도 목이 부러져 죽음. 게다가 성궤를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탈취당함.사무엘 ㅡ미츠바에서 필리스티아인들의 공격을 막고 사제가 되었으나 두 아들의 뇌물 수수등의 부정한 행동으로 신의 믿음을 잃음. 백성들의 왕 옹립에 대한 요청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해 불완전한 통치체제인 왕정을 수락함. 벤야민 가문의 사울을 왕으로 옹립함.사울왕ㅡ보잘것없는 부족의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신의 부름을 받고 왕이 되어 필리스티아와 영토 싸움을 충실히 수행함. 필리스티아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자신이 번제물 제사를 직접함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삼. 이후 신의 믿음이 다윗에게 옮겨간 것을 알고 다윗을 죽이고자 함.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신의 이름으로 수없이 맹세하고서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고자 함.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여기서 많은 반성을 함. 나 또한 방금 전에 한 말과 이어지는 행실을 어긋나게 한 적이 있으니.. 조심, 또 조심.) 인간의 교만함, 가련함을 대변하는 인물.다윗ㅡ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외모가 가장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기골이 장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선택받은 자가 되어, 사무엘에게 기름으로 축복을 받음. 골리앗을 조약돌로 쓰러뜨려 승리를 거두고 사울왕의 심복이 되지만,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에게 목숨 잃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김. 신의 이름으로 사울을 해치지 않겠다고 한 맹세를 끝까지 지킴. 그리하여 사울이 죽을 무렵 치클락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함. 미약한 자가 신의 선택을 받고 다시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는 구조라면, 다윗도 그 순서대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무엘하가 기대된다.‘교만함‘은 신에게도 버림받게 되는 큰 잘못이다.
너는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