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렌마트 희곡선 - 노부인의 방문.물리학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김혜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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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읽어보는 뒤렌마트 희곡선이다.

사실 별점 4점을 매기고 싶었지만 북플의 오류인지 자동으로 별점 3점이 매겨져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지도 ㅋㅋㅋ)


아무튼 이 뒤렌마트 희곡선은 희극, 비극과 같은 극작에 문외한인 내게 색다른 울림을 주었다. 그 울림이란 무엇인가 하면, 기존의 고대 시대 때 장엄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게 표현한 희, 비극이 현대에 들어와서 어떻게 표현되고 나타나는지를 알려준 것이다. 


그중에서 제일 첫 작품인 `노부인의 방문`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가난한 마을 `궐렌` 시에 그곳 출신이었던 노부인 `클레어 자하나시안` 여사가 방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는 희곡이다. 그런데 이 `노부인의 방문`은 작품 초반부에는 `희곡`에 맞게 온갖 괴상망측한 여러 가지 상황이 만들어지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비극적이고 심지어 공포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어 읽는 내내 땀이 날 정도였다. 

그 비극적인 일이란 노부인, 즉 `클레어 자하나시안`이 자신이 그동안 고생 끝에 얻게 된 부와 명성을 통해 마을 시장은 물론 그곳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복수는 말 그대로 상대방을 때리거나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닌, 과거 자기를 매몰차게 내친 마을 사람들, 아니 마을 전체에 대해 부와 명성으로 이들을 비열하고 타락한 존재들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복수였다. 


여기까지 말하면 무슨 `소돔`처럼 서로 멸망해 가는 도시 하나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마을 사람들 전체라면 모를까 이 복수 방법은 또 다른 면에서 특이한데, 그건 바로 사람들을 비열하게 만든 계기로 노부인은 과거 젊었을 적에 자신과 사귀었다가 매몰차게 버린 `일`이라는 노인을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대신 죽이게 하여 그 대가(정의)로 마을을 재건할 돈 10억 마르크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장과 경찰, 가난한 일반인들, 신부 등등 모든 사람이 점차 `일`을 압박해오는데, 거기서 절규하는 `일`의 모습은 가히 공포스럽다. 


그래서 나는 읽는 동안 이게 과연 희극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봐도 다수의 사람이 한 명을 희생시키려는 무서운 사건이 아닌가.

하지만 뒤에 저자인 뒤렌마트가 당부했듯이 이 작품은 엄연히 `희곡`이다. 

그가 말하길 자신은 현실에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뿐이며 본 작품은 정의나 도덕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아마 그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딱히 비극이 아닌 희곡이라고 한 것을 보면 흔히 우리들이 일상적인 것에 대해 비극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듯이(비극적인 부분을 찾기 어렵듯이) 궐렌 시에서 일어났던 사건 또한 우리 주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건일 수도 있기에 비극보다는 희극의 성격으로써 쓴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문제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잘 생각해보면 노부인의 분노, 정의를 돈으로 사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어찌 보면 정당한 요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노부인에게는 `일`에게 버려지고 나서 그의 아이를 사산했고 이후로 창녀 일을 전전하다가 미모로 부자와 명사들을 유혹하면서 마침내 돈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거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힘없던 시절에 자기를 무시했던 마을 사람들과 `일`에게 할 수 있었던 `현재`의 복수는 그녀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 방법이 매우 잔인했고 그녀의 뜻대로 시민들은 익살스럽게 자신들을 정당화하며 기꺼이 '일'을 죽이게 됨으로써 '현실'과 '돈'에 굴복하는, 시민성이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노부인의 방문`은 훌륭했다. 아직 뒤의 `물리학자`들은 읽지 못했지만 앞의 노부인 이야기만 봐도 뒤렌마트 희곡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표현 방식이 독특하고 다소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인해 다수의 인간이 어떻게 소수의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해 정당화할 수 있는지, 아니면 공동체 하나가 개인에게 어떤 무시무시한 철퇴를 가할 수도 있는지, 또 노부인의 복수는 정당했는지, 그리고 이게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등등(실제로 작품 내에서 시장은 국가를, 의사와 교장은 지식인들을, 기자들은 위기에 처한 사람보다는 사건의 자극적인 내용만 보도하려고 하는 가짜 언론인들을 상징하고 있다!) 많은 생각거리를 남기니 가벼우면서도 심오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느낌이고 극작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일지 몰라도 어쨌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참고로 비슷하게 느껴지는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작품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고 본다!)



일 : 아무도 나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일을 해 주기를 너나없이 바라고 있어요. 그러다 언젠가 어느 한 사람이 실행을 하겠지요. - P78

교장 : 저희는 참고 견디었습니다. 길고 긴 세월을요. 저희와 함께 이곳 모든 사람이 견뎌 냈습니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옛날 궐렌의 위대함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이요. 우리 고향 땅에는 엄청난 기름이 매장되어 있을 거다, 그런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될 날이 올 거다, 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클레어 자하나시안 : 사실 이곳 모든 공장을 제가 사들였고, 몽땅 폐쇄시킨 건 접니다. 당신들 희망은 미친 짓이었고, 기다림은 무의미했으며, 당신들이 한 희생은 어리석었으니 당신들의 일생은 헛되이 탕진된 거예요.
인간성이란 말입니다. 신사 양반들, 부호들의 돈주머니에서나 적당한 겁니다. 내가 가진 재력이 세상 질서를 만들어 내지. 세상이 날 창녀로 만들었으니, 이제 내가 세상을 유곽으로 만들겠어요. 도덕적으로 합당한 건 돈을 낼 사람뿐이에요. - P99

교장 : 나는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소 일. 나도 그 일에 가담할 거란 사실이요. 서서히 살인자로 변해 가는 나 자신이 느껴지오. 인간성에 대한 믿음은 힘이 없어요. 그걸 알기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소. 나는 두렵소. 일 씨, 당신이 그랬듯 두려워요. 아직은 압니다. 우리에게도 한 번은 저런 노부인이 오게 되겠지요. 언젠가는 말이오. 그러면 지금 당신이 겪는 일을 우리도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직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곧, 아마도 두세 시간만 지나도 나는 그런 사실을 망각하게 될 거요. - P116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인간을 묘사하며, 알레고리가 아니라 행동을 기술한다. 나는 세상을 제시할 뿐, 사람들이 지금까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도덕을 제시하는 게 아니다. 나는 결코 나의 작품을 세상과 대립시키려 하지 않는다.
- 뒤렌마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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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27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등장인물은 많이 나오는데 하나도 안햇갈리게 잘 읽혀서 좋더라구요. 물리학자도 재미있어요 ^^

오네긴 2021-09-27 00:44   좋아요 1 | URL
그러게말입니다 ㅋㅋ 저도 인상 깊었는지 집중하면서 읽게 되더라구요. 강의 때문에 노부인의 방문만 읽었는데 나중에 꼭 물리학자도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9-27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변주의 가능성을 둔 작품으로 읽혀지네요.
뒤렌마트, 하인리히 뵐 참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