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인 - 세상 밖에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
라미 카민스키 지음, 최지숙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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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세상에는 타인과 교류하며 에너지를 얻는 외향인(extrovert) 과, 홀로 보내는 시간 속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향인(introvert) 두 부류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이분법적 성향 분류에 익숙한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심리적 특성을 파악할 때 이 두 가지 스펙트럼의 어디쯤 위치하는가를 묻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무리에 섞여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른바 ‘이향인’(otrovert) 이라는 제3의 낯선 개념을 제시한다. 소속감이라는 것이 인간이 반드시 좇아야 할 미덕이 아니라 단지 실체 없는 감정에 불과하다고 꼬집으며, 저자는 자신을 비롯하여 군집적 사고(hive mind)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이향인의 세계를 소개한다. 이 책이 제시하는 낯선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보며 과연 나는 이향인의 특성에 얼마나 맞닿아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저자의 이러한 도발적 분류가 지니는 가치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물론, 인간의 복잡다단한 성향을 또 하나의 새로운 틀로 규정짓고 선명한 경계선을 그으려는 저자의 시도에 모든 독자가 선뜻 동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외향성과 내향성이라는 기존의 스펙트럼 안에서도 얼마든지 겹치는 교집합이 존재하는데, 굳이 ‘이향인’이라는 독립된 범주를 신설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학술적, 경험적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누군가는 이를 그저 내향성의 또 다른 극단적 발현이나, 획일화된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군중 속의 고독’을 그럴싸한 용어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할 수도 있다. 저자는 비록 이향성이 이분법적이어서 ‘이향인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단언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주어진 상황과 생애 주기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모순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통찰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때로는 이 단호한 구분이 다소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활자를 따라갔다.

 

저자가 정의하는 이향인의 특성을 짚어 나가다 보면, 불가피하게 자기 내면을 향해 예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과연 이향인인가?’ 책에 따르면 이향인은 태생적인 개인주의자이자 온순한 저항가다. 어느 순간 이게 꼭 독자 자신의 얘기인 듯 사뭇 반가울 때도 있다. 이들은 겉으로는 집단에 융화된 것처럼 사회적 역할을 능숙하게 연기하지만, 내면의 독립된 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갈등과 대립을 뼛속 깊이 혐오하여 굴복하기보다는 애당초 경쟁에 끼어들지 않는 길을 택하며, 타인의 경제적 성공이나 지위에 무심하다. 이러한 대목을 읽노라면, 조직 사회에서 소모적인 다툼을 피하려고 우유부단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화려한 인맥의 허상보다 나만의 고요한 시간과 평온을 갈구해 온 수많은 개인은 자신 안의 ‘이향성’을 발견하고 묘한 위로를 얻을지도 모른다.


특히 학교나 군대, 혹은 기업과 같이 공동체의 규범을 강요하는 억압적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겪는 내적 갈등을 묘사한 부분은 탁월하다. 우리 사회는 타인에게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진정한 자아를 포기할 것을 종용한다. 청소년기의 또래 집단이 요구하는 맹목적인 소속감에 짓눌려 가짜 외향인 행세를 해보았거나, 협업을 강요하는 직장 문화 속에서 에너지가 방전되는 뼈아픈 경험을 해본 독자라면 저자의 분석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이향인들이 겪는 극도의 소모감은 오늘날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근본적인 우울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독서가 깊어질수록 내 안에 내재한 이향적 파편들과 동시에, 이향인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모순된 자아 역시 마주하게 된다. 저자는 이향인이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이미 필요한 정보를 모두 갖고 있기에 타인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신의 운명을 독자적으로 수용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욕구와,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미성숙함을 빈번히 드러낸다. 진정한 ‘정서적 자급자족’을 이루고 자신과 편안한 관계를 맺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저자가 제시한 완벽한 이향인의 이데아에 비추어볼 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관계의 단절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번민하는 평범한 자아를 가진 나는 ‘결국 순전한 이향인은 아니구나’라는 솔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현대 사회 파편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 마침 정보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등장한 도구일 뿐이라는 역설처럼, ‘이향인’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인류가 아니다. 그들은 늘 우리 사회의 틈새에 묵묵히 존재해 왔으나 집단주의적 잣대에 의해 ‘부적응자’ 혹은 ‘사회성 부족’이라는 오명을 쓴 채 적절한 이름표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저자의 이분법적 분류에 100% 동의하지 않더라도, 혹은 스스로가 완벽한 이향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집단의 폭력적인 정상성에 짓눌려 숨죽이던 이들에게 ‘이향인’이라는 안식처 같은 이름을 부여했다는 데 있다. 군집적 사고의 합의를 거부하고, 무리한 소속감에 목매는 대신 자신만의 풍요로운 내면세계 가꾸기의 정당성을 역설한 이 책은, 고립과 분열이 가속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나다운 삶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적 지침서다. 완벽한 이향인은 아닐지라도, 집단과 나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두고 정서적 자급자족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획일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통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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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어른의 한자어 - 생각은 깊게 표현은 분명하게
김웅식 지음 / 보누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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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김웅식 저자의 『품격 있는 어른의 한자어』는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놓치고 있던 단어의 깊이와 언어의 품격을 따뜻하게 짚어주는 책이다. 책은 결코 딱딱한 고사성어나 어려운 한자를 무작정 외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날마다 쓰는 말들의 뿌리를 함께 찾아가며, 그 안에 숨겨진 본래 의미와 결을 다정하면서도 또렷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매일 쓰는 말 중 한자에서 유래한 단어가 수두룩한데도, 정작 그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올바른 뜻을 몰라 상황에 맞지 않게 쓰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일도 흔하다. 공문이나 공지의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착각해 일을 미루거나, 깊은 사과를 전하는 '심심(甚深)한 사과'를 "지루하고 심심해서 하는 사과냐"라며 엉뚱하게 분통을 터뜨리는 웃지 못할 일들이 일상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다.

 

또한, 발음이나 형태는 비슷하지만, 한자의 쓰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수많은 '대립쌍'들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언어를 아슬아슬하게 다루는지 보여준다. 대금을 정산하는 '결제(決濟)'와 서류 승인을 받는 '결재(決裁)'를 헷갈리고, 기술을 개척하는 '개발(開發)'과 잠재된 재능을 열어주는 '계발(啓發)'을 구별하지 못하며, 상태를 유지하는 '보존(保存)'과 온전히 보호하거나 메우는 '보전(保全)'을 혼용하는 일들이 대표적이다. 회사에서 사람을 부르는 '고용(雇用)'과 남의 일을 해주는 '고용(雇傭)', 학습 능력인 '학력(學力)'과 학교 경력인 '학력(學歷)'에 이르기까지, 단어의 한 끗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 발생하는 소소한 오해들은 우리가 언어적 맥락과 언어 주권의 기틀을 얼마나 위태롭게 놓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이러한 어휘의 맥락을 짚는 일은 더욱 절실해졌다. 통계청 조사 기준 성인 종합독서율이 30%대까지 급감하는 등 책을 읽지 않는 풍조가 고착된 데다, 공교육 현장에서 한자 교육이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마트폰 중심의 디지털 기기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짧은 영상이나 요약본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의 뇌는 길고 정교한 글을 읽어내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실제로 국가 조사에 따르면 성인 인구의 약 20%가 일상적인 문서나 문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 상태인 것으로 보고된다.

 

모순적인 것은, 우리 사회가 우리말의 바탕이 되는 어휘력과 기초 문해력을 가꾸는 '우리말 살리기'에는 지극히 인색하면서도 조기 영어 교육과 영어 사교육에는 매년 수조 원대의 막대한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부와 통계청의 사교육비 조사에 따르면 초·중·고 영어 사교육비 집행액만 연간 6조 원을 훌쩍 넘어서며 전체 과목 중 최상위권을 다투고 있다. 모국어 어휘의 결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래어와 영어를 우선시하는 이러한 불균형은 결국 우리 공동체의 정신적 기반이자 생각의 주도권인 '언어 주권'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 언어를 정교하게 다루지 못해 외부 언어나 자극적인 표현에 휘둘리는 순간, 우리는 생각의 자립성을 잃고 언어 주권을 스스로 내려놓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어휘력의 수직 하락은 단순히 '아는 단어 수가 적다'는 개인적 불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말 어휘의 과반수가 한자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정교한 표현을 잃어버린 사회에는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언어만 남게 되며, 결국에는 사회 전체의 의식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킨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 여파로 시민 사회가 애써 쌓아 올려 온 민주주의의 탑마저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안타까운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건전한 비판과 성숙한 토론 대신 맹목적인 진영 논리와 자극적인 선동 언어만이 판을 치는 현실은 결국 언어 주권과 사고의 빈곤이 가져온 씁쓸한 결과다.

 

저자는 이러한 언어적 혼란 속에서 단어의 진짜 뜻과 맥락을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이 왜 어른다운 품격을 만드는 첫걸음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책에서 들려주는 단어의 유래와 올바른 쓰임새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말 습관을 돌아보게 된다. 상황과 상대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는 능력은 단순히 지식을 뽐내는 일이 아니다. 타인과의 소통에서 오는 오해를 줄이고, 한층 다정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해주는 마음의 교양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모국어 어휘의 빈곤이 생각의 빈곤으로 이어지기 쉬운 디지털 시대에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을 준다. 우리 말의 언어 주권을 단단히 지켜내고, 내 생각과 시선을 한 단계 더 깊고 풍성하게 가꾸고 싶은 모든 어른에게 필요한 지침서다.

 

#보누스 #김웅식 #생각은깊게 #표현은분명하게 #품격있는어른의한자어 #한자교육필요 #국어어휘력 #언어는존재의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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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어른의 한자어 - 생각은 깊게 표현은 분명하게
김웅식 지음 / 보누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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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시간에만 읽어도 어휘력 내공이 쑥쑥 자라는 괴화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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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위한다는 착각
신재용 지음 / 반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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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자동적으로 약을 찾는다. 고혈압과 고지혈증, 그리고 이명 판정을 받은 지 벌써 몇 년째. 한 움큼의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키며 ‘오늘 하루도 내 몸을 위해 할 도리를 다했다’는 묘한 안도감에 젖는다. 사실 나의 건강 관리는 각 잡고 땀 흘리는 '진짜 운동'은 피하고 싶으면서도 건강은 챙기고 싶어 하는, 소심하고 이율배반적인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본격적으로 운동할 용기는 없으니 출퇴근길 지하철과 사무실 계단에서 헉헉대고, 퇴근길엔 굳이 한 정거장 먼저 내려 집까지 터덜터덜 걷는다. 과식이라도 한 날엔 왠지 모를 죄책감에 쫓기듯 어둑한 산책로를 배회한다. 남들이 보면 일상 속 걷기를 실천하는 부지런한 사람 같겠지만, 실상은 운동의 수고로움을 피하려다 피로도만 높이고 있는 안쓰러운 자화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건강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몸에 무언가를 계속 '집어넣거나' 소극적인 타협안으로 면죄부를 얻으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책은 이렇게 하루하루를 애처롭게 방어하던 나의 맹신에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약사이자 면역학 연구자, 나아가 스스로 신장 이식까지 경험한 저자는 현대인의 맹목적인 건강 염려증, 혹은 집착을 '더하기 중독'이라 꼬집는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으로 달려가고, 수많은 건강기능식품에 의존하며 건강을 '결제'하려는 태도를 진화의학적 관점과 최신 논문을 통해 비판하는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진정한 건강은 무언가를 계속 더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에서 비로소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이 '덜어내기(뺄셈)' 철학은 나의 지질한 건강 관리법을 되돌아보게 했다. 돌이켜보면 내 일상 역시 철저한 덧셈이자 보상 심리였다. 피곤을 무릅쓰고 억지로 계단을 오른 보상으로 달콤한 간식을 찾았고, 땀 흘려 근육을 깨우는 본질적인 노력은 외면한 채 약을 챙겨 먹으며 위안을 얻었다. "이 정도 걸었으니, 이 약을 먹었으니 괜찮겠지"라며 자신을 다독여온 것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영양제와 어설픈 걷기로 쌓아 올린 나의 방어벽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깨달았다.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긴 억지 활동과 과잉 영양은 도리어 내 몸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맹목적인 더하기와 애처로운 타협을 멈춘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유의 회복력을 믿고 쉼 없이 몸을 움직이는 정직한 일상뿐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여전히 운동복을 차려입고 한계까지 땀 쏟는 일이 성가신 사람이다. 뭔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쳐다보지도 않는 이상한 성격도 한 몫 거든다. 퇴근 후엔 으레 소파와 물아일체를 실천한다. 하지만 이 책을 기점으로 내 마음속에는 분명한 변화가 움트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진짜 운동을 다른 꼼수로 대체해 보려던 강박을 덜어내고 나니, 역설적으로 그 빈 자리에 '자발적인 각오'가 들어선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지름길이나 얄팍한 타협안이 통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진실을 마주하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남은 과제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엉덩이를 떼고 밖으로 나가는 것.

 

내일부터는 의무감에 쫓기는 억지 계단 오르기나 마지못해 걷는 퇴근길이 아니라, 오롯이 내 몸의 감각을 깨우기 위해 딱 30분만 기분 좋게 동네를 걸어보리라. 누군가의 강요나 불안감이 아니라, 내 몸의 본질을 깨닫고 스스로 다지는 순수한 각오다. 결국 이 책은 기적의 비법을 읊어주는 약장수가 아니다. 얄팍한 타협으로 하루를 방어하던 내 어깨를 다독이며, 날것 그대로의 몸을 대면하게 만드는 거울이다. 영양제에 의존하고 억지스러운 걷기로 진짜 운동을 피하려 애쓰던 가엾은 영혼이여, 이제 무거운 강박을 덜어내고 운동화 끈을 묶어 볼 차례다. 마침내 문밖으로 내디디는 그 홀가분한 첫걸음이야말로 진짜 건강을 되찾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될 테니까.

 

#보누스 #건강을위한다는착각 #신재용 #건강관리 #운동 #영양제오남용 #건강보조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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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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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듯, 죽음 역시 온전히 나의 의지대로 맞이하기란 쉽지 않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늙고 병든다는 것은 삶의 존엄한 마침표라기보다, 정교하게 짜인 격리 시설에 수용되는 과정에 가까울 때가 많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이 책에서 한 서민 여성의 삶을 통해 노년이 마주하는 이러한 잔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포착해 낸다. 그는 어머니의 요양원 입소와 죽음을 계기로 계급과 성별, 그리고 노년이 얽히며 발생하는 사회 구조적 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 책을 읽는 일은 그저 남의 비극을 건너다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 부모님의 마지막 순간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우리들의 아픈 경험을 다시 불러내며, 머지않아 다가올 나 자신의 미래를 또렷이 직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에리봉의 치밀한 사회학적 분석과 그 곁에 보탠 개인적 단상은 노년과 죽음이 더 이상 골방 속 사적인 문제로만 남을 수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기 신체와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율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노화는 이 자율성을 뿌리째 흔든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유롭게 움직이던 팔다리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을 때 느껴지는 공포는 삶의 기본적 조건마저 무너뜨린다. 나이 드는 것이 점차 두려워지는 직접적인 이유다. 신체적 취약성은 단순한 건강의 문제를 넘어 개인이 지닌 자유와 권리를 무(無)로 돌아가게 만드는 무서운 형틀이다.

 

에리봉은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하면서 경험한 자율성의 상실을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요양원은 겉으로는 돌봄의 공간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바깥 세계와 단절된 채 개별 노인의 삶을 구획하고 통제하는 격리의 장소이다. 그곳에서 노인은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잃고, 타인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상태에 놓인다. 이는 단순한 주거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지녀온 정체성과 권익, 즉 ‘자기 영토’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축소되는 탈인간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치매 판정을 받은 아버지를 주간보호센터와 요양원, 요양병원을 순례하며 모셔야 했던 내 가족의 경험과 궤를 같이한다.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조금씩 인간다운 삶에서 멀어져 가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일은 애통함 그 자체였다. 당신이 처한 상황을 예감했기에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쓸쓸한 고립을 받아들이시던 아버지의 담담함 뒤에는,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한 자의 거역할 수 없는 체념이 깔려 있었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이처럼 노인의 죽음을 외롭고 신속하며 은밀하게 치워버림으로써 공적 영역에서 은폐한다고 지적한다.

에리봉의 어머니가 겪은 노년의 비극은 그가 평생 짊어져 온 서민 여성으로서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다.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몸이 망가지는 작업 조건 속에서도 침묵해야 했고, 가부장적 가정 환경 속에서 불행을 견뎌내야 했다. 저자는 지식계급으로 이동한 후에도 마르크스주의적 언어를 통해 출신 계급에 대한 지적 충실성을 유지하며, 어머니와의 거리를 메우고자 애쓴다.

 

여기서 프랑스 사회의 계급 의식과 한국 사회의 역동성 사이에 흥미로운 대조가 발생한다. 프랑스의 계급 이탈자들은 신분 상승 후에도 자기 뿌리인 노동계급 정체성을 자각하고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계급 정체성은 연대의 기반이 되기보다 조속히 탈출해야 할 과거로 인식되었다. "자식에게만큼은 고된 노동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강한 신분 상승 욕구는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저항으로 발전시키기보다, 가족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흡수시켰다.

 

그러나 이처럼 고통을 개인의 희생으로 환원한 결과는 잔혹하다. 일평생 몸을 바쳐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이르러 신체적 능력을 잃은 대다수 서민들은 사회적 안전망 없이 각자도생의 길로 몰리게 된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침묵은 노년의 무기력함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사회적 배제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현실에서의 한국 노인복지는 기초연금·장기요양보험·노인일자리사업 등 막대한 예산과 제도를 운용하고 있음에도 최상위권의 노인 빈곤율이 보여주듯 실질적 생계 보장과 양질의 삶을 견인하지 못하는 '양적 확대와 실효성 부족 사이의 모순'을 안고 있다.

 

에리봉은 책의 후반부에서 매우 근본적인 정치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고령자들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통적인 철학과 정치 이론은 경제적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건강한 주체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자신들을 조직화할 수 없고 생산성을 상실한 노년층은 이론적·정치적 사유의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노인들은 신체적·정신적 약화로 인해 노동조합이나 정당과 같은 집단적 결사체를 구성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힘’이 없다. 민주주의 체제가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 집단의 요구를 우선으로 반영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발언권을 상실한 노년층의 문제는 정책과 예산 배분 과정에서 늘 뒷전으로 밀려난다.

 

한국 사회가 처한 참담한 노인 빈곤율 역시 이러한 정치적 발언권의 부재와 직결되어 있다. 노인의 가난과 소외는 단순히 국가 예산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고통을 공적인 언어로 호소할 수 있는 길, 즉 자신들을 대변할 '우리'라는 주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변할 정치적 힘이 없는 집단의 비극은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되고, 정치적 무력함은 경제적 빈곤으로 고착화된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한 지식인이 어머니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자, 노년이라는 삶의 마지막 단계를 향한 깊은 사회학적 성찰이다. 저자는 자신이 가진 지식인의 언어를 통해 평생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그리고 세상의 모든 소외된 노인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자 애쓴다.

 

태어나는 순간을 선택할 수 없었듯, 우리는 나이 듦과 노화를 피할 수 없다. 훗날 나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고 에리봉의 어머니가 걸어갔던 그 쓸쓸한 고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신체적·정신적 제약으로 스스로 결사할 수도, 사회를 향해 소리 높여 외칠 수도 없는 그 무력한 상태에 다다랐을 때, 과연 우리 사회에서 누가 그들의 진정한 대변인이 되어줄 수 있는가? 정치적 표 계산에 따라 표류하는 시민단체나 정당인가, 아니면 그들의 고통을 단지 학문적 연구 대상이나 뉴스거리로 소비하는 지식인과 미디어인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을 대신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대변자의 기만이나 왜곡의 위험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어떤 자격으로 그 정당성을 얻어 스스로 언어를 잃어버린 노년층을 정말로 대변할 수 있는가? 머잖아 노년을 맞이할 시점에 이 책을 읽고 떠오르는 질문의 무게가 사뭇 무겁게 다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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